의이자와 허유의 만남
[장자43] 대종사(16) 아! 내 스승!
"아! 내 스승"
36. 의이자(意而子, 의지의 선생)가 허유(許由)를 만나러 갔습니다. 허유가 말했습니다.
“요 임금이 자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던가?”
의이자가 대답했습니다.
“요 임금이 제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인의(仁義)를 실천하고, 시비(是非)를 분명히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무엇 때문에 여길 찾아왔는가? 요 임금이 벌써 자네 이마에 인의로써 먹물을 새겨 넣고 시비로 자네 코를 자르는 형벌을 가했는데, 자네가 어찌 저 자유분방하고 유동성 많은 도(道)의 세계에서 노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저는 그 언저리에서라도 노닐고 싶습니다.”
“그럴 수 없네. 눈먼 자는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수놓은 옷의 색깔과 상관이 없는 것이니까.”
37. 의이자가 말했습니다. “미인 무장(無莊)이 그 아름다움을 잊고, 장사 거량(據梁)이 그 힘을 잃고, 황제(黃帝)가 그 앎을 잊은 것은 모두 용광로 속에서 다시 단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조물자가 저의 먹물을 지워 주고, 저의 베어 나간 코를 되살려 저를 온전히 한 다음 선생님을 따를 수 있게 해줄지 누가 알겠습니까?”
허유가 대답했습니다. “아. 그럴지 모르겠군. 내 자네에게 말해 줌세. 내 스승, 아, 내 스승. 스승은 만물을 이루어 놓지만 스스로 의롭다 하지 않고, 만세에 혜택을 베풀지만 특별히 편애하는 일이 없고, 옛날보다 오래되었으나 늙지 않고, 하늘을 덮고 땅을 받들고, 여러 가지 모양을 깎아 내지만 재주를 부리지 않네. 여기가 바로 자네가 노닐어야 할 곳일세.”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에서 발췌
이 대목에서의 등장인물은 요임금으로부터 인의(仁義)를 실천하고, 시비(是非)를 분명히 하라는 배움을 새긴 의이자와 도(道)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허유 두 사람이다.
이 연재글들을 부지런히 읽어온 독자님들이라면 이제 이 대목의 내용쯤은 한눈에 파악되리라고 믿는다. 장자가 기존에 지어내는 구조 속에서라면 여기서는 의이자 대신 공자가 등장했을 법한 대목이다. 장자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인의(仁義)를 내세우는 인물의 중심에 공자를 세웠다. 하지만 공자 대신 의이자를 등장시킨 이유는 아주 적극적으로 허유로부터 도와의 합일을 이루는 방법을 배우고자 하는 인물이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새로운 배움을 얻고자 하는 인물이 되기에 공자는 너무나 인의에 대한 인위적 배움이 깊고 확고하며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요즘말로 치면 분명 인싸(인사이더)가 아닌 아싸(아웃사이더)에 가까운 인물인 듯 보인다. 온세상이 칭송하는 요임금이라 해도 인의 따위에 매몰되면 가차없이 아웃이다. 그러니 자신의 글 속에서 공자쯤 수시로 날려버리기는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공자의 가르침이 세상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 요임금의 치세가 세상을 망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절대 그렇지는 않다. 너무나 혼란스러운 세상이기에 그나마의 인위적인 규칙과 치세는 분명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장자는 너무나 순수한 이상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 호접몽이라 알려진 대목을 떠올려보면 장자의 그런 면을 세심하게 살피고 되새겨볼 수 있다.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장자의 그런 마음을 살피자면 2천 년의 세월을 넘어 그의 마음을 토닥여주고 싶다.
의이자라는 이름을 풀이하면 의지의 선생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의지를 정신적 측면에서 아주 좋은 요소중 하나로 여긴다. 하지만 도를 따르고자 하는 장자의 관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의지는 도를 따르고 하나 되는데 있어서 크나큰 방해요소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특히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로 들릴만한 내용이다. 의지가 방해요소라니? 의지는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한 필수요소가 아닌가!
앞의 어느 글에선가 필자가 기독교 기도문의 한 구절을 인용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내가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어찌 해보겠다는 그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큰 방해요소가 뭐다? 바로 나 라는 존재를 고집하는 의지, 내 뜻대로 하겠다는 의지이다. 필자가 여러번 인용하고 강조했던 또 다른 구절이 있었다. ‘진인사 대천명’. 여기서는 진인사 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의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할 만큼 다 한 이후에는 완전히 내려놓고 평안해져야 한다. 시험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는 물론 의지가 필요하다. 시험을 치른 후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의지가 필요 없다. 아니 합격했으면 하는 의지를 불태울수록 더욱 괴로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반대로 한다.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생각처럼 의지를 불태우지도 않으면서 시험을 친 후에는 이상한 의지와 집착에 쩔어서 안절부절 조마조마 하는 것이다.
명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명상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서 자세를 취하기 까지에는 약간의 의지가 필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명상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의지를 세우는 것은 몸의 긴장을 유발하고 정신적 집착으로 이어져 그 진행을 더디게 한다. 이런 식으로는 집중적으로 명상을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특별히 시간과 경비를 들인 만큼의, 그 이상의 효과를 기대한다. 그리고 기대하는 만큼 긴장하고 집착한다. 그리고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서는 ‘에이, 효과도 없는 일에 돈을 버렸어!’ 라고 투덜거린다. 정말 그런 이유일까?
종종 뜻밖의 시간에 ‘큰 일’ 들이 일어난다.
큰 의지를 들여보았지만 ‘별 일’ 없었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원하는 결과, 기대하는 결과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혹은 명상을 너무나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현실적인 일들 때문에 바빠서 한동안 자리에 앉아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어느날 어느 순간, 마음을 저절로 탁 내려놓게 되었는데 뭔가가 확 일어나는 것이다. 뭘 내려놓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의지다.
의지라 쓰여진 동전의 반대 면에는 집착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의지가 없어’ 라며 자신을 책망하면서 지내는 모습을 본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누구도 의지가 제로인 상태에서 지내지 않는다. 만약 의지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다면 훨씬 더 경이로운 일들 - 내 뜻대로가 아닌 크나큰 절대자, 즉 도(道)의 뜻대로 - 이 일어날 것이다. 그나마도 의지가 충만하면 인위적인 일들은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의지라는 이름의 게이지의 바늘은 30과 70 사이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으리라.
그래서 당신의 선택은? 현실 - 의지와 집착 - 인가 도(道) - 의도없음과 내려놓음 - 인가?
장자의 작명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의지에 대한 배움으로 살아가던 의이자는 의지를 내려놓아야 한다. 아, 어쩌면 그래서 의이자라고 했을까? 의지가 충만한 사람에서 의지를 완전히 내려놓고 도(道)의 큰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게 되리라는 뜻에서 말이다.
허유가 대답했습니다. “아. 그럴지 모르겠군. 내 자네에게 말해 줌세. 내 스승, 아, 내 스승. 스승은 만물을 이루어 놓지만 스스로 의롭다 하지 않고, 만세에 혜택을 베풀지만 특별히 편애하는 일이 없고, 옛날보다 오래되었으나 늙지 않고, 하늘을 덮고 땅을 받들고, 여러 가지 모양을 깎아 내지만 재주를 부리지 않네. 여기가 바로 자네가 노닐어야 할 곳일세.”
지금 글을 진행하고 있는 이 파트의 명칭이 대종사 - 큰 스승 - 임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여기서 의이자가 배움을 청하는 허유는 자신의 스승이 도(道)임을 에둘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붓다의 가르침을 떠올려보자.
약 2,500년 전 석가모니 붓다는 죽음을 불사한 온갖 고행 끝에 고행이 답이 아님을 알게 된다. 또한 고행의 정반대 측면인 육체적 정신적 쾌락 역시도 답이 아님을 알고 중도에서 길을 찾는다. 과거 어린 시절 초선 삼매에 들었던 때를 떠올리고 되새기면서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명상에 들어서 무상정등각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렇게 나온 가르침의 가장 굵직한 내용이 바로 사성제다 - 그리고 팔정도는 사성제 속에 포함되며 팔정도에도 사성제가 포함되어 둘은 서로 순환관계를 이룬다(팔정도의 첫번째 항목인 정견/바른 견해가 곧 사성제이다).
사성제는 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내용일까?
아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로 풀이되는 사성제는 우주의 생성-변화-소멸과 더불어 이미 그 속에 녹아있는 현상적 진리다. 그래서 사제(四諦, 네가지 진리) 혹은 사성제(四聖諦,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라 부른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붓다는 누군가로부터 배우거나 들어서 이것을 깨우쳤을까? 아니다. 스스로 진리를 깨우쳤기에 싯달타 왕자였던 석가모니를 붓다라고 칭하는 것이다.
불가에서 전하는 내용중에 과거칠불이라는 것이 있다. 즉 석가모니 붓다 이전의 아주 오래전 언젠가에 여섯 부처님들이 더 계셨다는 뜻이다. 그분들 모두가 각각 사성제를 깨우쳤고 각각의 역사적 기록은 끊어졌다. 얼마나 까마득히 오래전의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 이 세대 현생의 문명 이전에 끊어졌던 내용을 되살려낸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인 것이다. 이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사성제라는 가르침이 있기 전에는 무수히 반복되는 윤회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하다가 벗어날 길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의 전부가 초기경전의 (거의) 왜곡 없는 8만4천 경전을 통해서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정도면 허유처럼 두루뭉술하게 ‘스승은 만물을 이루어 놓지만 스스로 의롭다 하지 않고, 만세에 혜택을 베풀지만 특별히 편애하는 일이 없고, 옛날보다 오래되었으나 늙지 않고, 하늘을 덮고 땅을 받들고, 여러 가지 모양을 깎아 내지만 재주를 부리지 않네’ 라는 말을 등불 삼아 더듬더듬 길을 찾아가기보다 훨씬 더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석가모니 붓다는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그가 실존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주를 이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아쇼카 왕의 석주(돌기둥)가 발견되면서 실존인물로 확인되었다. 점성술에서는 지금 이 시대를 숨겨졌던 것이 알려지는 특성을 가진 물병자리 시대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언제든 마음 먹으면 붓다의 원음을 기록한 5부 니까야 초기경전 전문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도 집에서 PC나 휴대폰만 집어들어도 가능한 일이다. 너무나 다행스럽고도 감사한 일이다.
이 삶의 괴로움에 빠져 허우적대던 내가 처음으로 탈출의 희망을 본 것이 해탈이라는 단어를 듣고서였다. 열다섯의 무지와 젊은 패기로 명상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온갖 경험들을 지나고 20년이 지나서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마침내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접할 수 있었다.
부처님이 태어나고, 깨닫고, 처음 설법하시고 열반하신 인도의 불교 4대 성지 중 열반하신 쿠시나가르에 세운 람바르 스투파가 있다. 쿠시나가르는 인도의 도시들 중에서도 2,500년 전 과거나 지금이나 참으로 외진 오지의 시골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깨달음을 얻으신 곳이라 해서 세워진 성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부다가야의 대탑보다 초라한 모습의 람바르 스투파의 기운이 훨씬 더 깊이 있게 느껴졌다.
지금도 나는 경전에서 부처님의 열반 대목을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는 아내는 기승전해탈이라며 두고두고 놀리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의 진정한 스승이 가시는 장면이 항상 너무나 안타까운 것을.
허유와 대상은 다르지만 나는 좀 더 구체적인 대상이 되는 분을 가슴 먹먹해지는 마음으로 불러본다.
아! 내 스승!
나무석가모니불!
P.S.
누구든 자신의 마음 깊이 스승으로 삼는 한 분을 두고 살아가셨으면 합니다.
나아가는 그 길에 평화와 축복을 기원합니다.
- 明濟 명제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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