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천연덕스럽게 안부를 묻는다.
그래봤자 일 년에 한두 번 전화를 먼저 걸까 말까 하다가 생일이라서 한 번, 연말이라서 또 한 번. 그런 식의 연례행사 같은 안부를 아무렴, 갑작스러운 인사만큼 능청맞은 것이 어디 또 있을까 싶다.
몇 개월 만에 N과 나는 안부를 주고받았는데 오랜만에 소식을 전하는 N은 매일매일 시간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고 했다. 글도 창작도 못할 바엔 돈이라도 벌면서 시간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보통의 사람들과 같은 직장인의 모습으로 출근을 하고 야근을 하다 얻은 스트레스성 위염 때문에 최근부터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 삼천포로 빠진 대화 속에서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왜냐하면 애초부터 이해할 수가 없거든. 머리로는
더더욱 안 되는 거고… 그나마 가슴으로 이해해 보려는 게 나을까.”
남들처럼 흔히 꺼내놓는 회사 상사에 대한 험담 같은 건 언젠가부터 진부해졌다. 이제는 시절 속의 인연이 되어버린 옛사람들과의 추억들이 물 위에 떠 있는 윤슬처럼 아스라이 스쳐가는 듯했다.
“집중할 곳이 적어진 거네요 그럼.” N이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매일 하루하루가 정해진 시간 속에서 한정된 공간 안에 갇혀 나는(우리는) 최소치의 감정을 쓴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조차 서로에게 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덜하지도 않음의 덧셈과 뺄셈이란 새삼 어른이 되고서야 산수를 여러모로 써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웃기면서도 퍽 슬프다는 것이다.
어른이란 그런 것. 사과 한 개를 반으로 쪼갰을 때 누가 더 큰 것을 먹겠느냐가 아닌 누가 이 사과를 둘 이상으로 나누었는지에 대한 효율적 계산이 앞서는 것. 뜨거워짐에 대한 미학은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 머리보다 단단해진 심장이 말캉거리지 않으니,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은 곧 혈류가 아닐 게다.
한 해의 마무리를 앞둔 12월 끝에서 죽음을 앞둔 어느 시한부 음악가의 피아노처럼, 마당에서 몇 년의 시간 동안 수차례 비바람을 맞고 도장도 다 벗겨진 피아노가 본래의 나무로 돌아온 것처럼, 사람 또한 돌아갈 곳은 정해져 있지만 그 섭리를 기필코 꺽지 못하여 긴 시간 동안 저마다의 방황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실험’ 이라는 이름으로, 시험 삼아 피아노를 마당에 그냥 놔둬보기로 했습니다. 몇 년의 시간 동안 수차례 비바람을 맞으며 도장도 다 벗겨진 지금은 점점 본래의 나무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_류이치 사카모토, 책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사진, 류이치 사카모토의 피아노, 책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사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