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by 이효진



비가 오는 나른한 오후였습니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었고 버스 안에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있습니다. 방금 전 안내 방송은 ‘이번 정류장’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어린 여자아이와 아이의 어머니가 탔습니다.


하지만 버스는 출발할 기미가 없어 보입니다.

저는 에어팟을 빼고 열려있는 앞문을 바라봅니다. 분홍색 장화를 신은 아이가 서 있고 아이의 어머니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음료를 닦아내고 있습니다. 아이의 손에 음료컵이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아이가 흘린 것 같습니다.


짐작건대 실수였을 겁니다. 하지만 버스 기사님은 화가 나셨고 원래 음료가 든 컵을 들고 탈 수 없는 게 원칙상 맞긴 합니다. 그래도 맘 한구석이 불편한 이윤 왜일까요.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 나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친구들을 만나면 어쩌나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그때는 우산을 펴고 얼굴을 가려도 피할 수 없는 창피함이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어깨가 비에 다 젖어도 웃을 수 있는 건 어떤 사랑입니까.


어른이 되어도 버티기 힘든 순간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마음이 약해지고 그럴수록 머리가 커지는 게 인간의 본모습일까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꾸밈없이 사람에게 솔직해질수록 친절을 가장한 존재가 들통납니다. 그럴수록 허울뿐인 관계는 금방 어긋나고 또 한편으론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빗속을 걸으면 하나 둘 밀려나는 주변의 풍경.

우산 속에 겨우 한 명 걸어가고 있을 뿐인데 마치, 우주 속에 홀로 떠 있는 왜소행성처럼 손잡이를 꽉 잡고 걸어갑니다. 살아가고 살고자 앞으로 걸어가는 길이 가끔씩 버겁고 어느 곳에 서 있는지 모를 때.


이제는 사랑이 제법 무거운 줄 압니다.

언제 왔냐는 듯이 비가 갠 맑은 하늘에 작은 흔적조차 희미해질 때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불면 그 순간, 먼발치서 사랑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다시, 너의 이름은 여름입니까.

보이지 않게 말없이 지켜주는 마음. 그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뜨거운 햇살, 소나기, 물빛 하늘. 여름의 모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