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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Dec 12. 2022

그래서, 퇴사하고 뭐하지

대책도 없이 퇴사했단 소리를 듣긴 죽기보다 싫었다.

팀장에게 퇴사 의사를 전하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부모님께 이 소식을 전하는 일이었다.


잠깐 우리 부모님에 대한 설명을 해 보자면, 두 분 다 1960년대 초에 경상도에서 태어나신, 아주 보수적인 분들이다. 공무원인 아버지는 (당시 많은 분들이 그랬듯이) 한 직장에서 3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셨고, 항상 인생의 최전방에서 에너지를 쏟으면서 사신 분이었다. 그에게 인생이란 언제나 모든 심지를 끝까지 태워가며 버텨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 역시도 마찬가지다. 나는 부모님께 "천천히, 쉬어가며, 건강 챙겨 가며 해" 류의 말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인생은 끊임없이 뛰어가는 것이라 배웠다. 중간에 넘어지거나 병이 나면 약을 먹고 달려야 했다.


그래도 다행히 어머니께는 반년 전부터 열심히 밑밥을 깔아 뒀었다. 직장생활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깨달았으며,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약을 먹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음을 꾸준히 얘기해뒀다. 덕분에 어머니는 딸내미의 퇴사 소식을 듣고도 별말씀이 없으셨다.


반면 아버지께는 온갖 수준의 악담을 들어야 했다.
(미리 말하는데, 나는 대책도 계획도 없이 퇴사한 게 아니었고 이 사실을 아버지께도 말씀드렸었다.)


이때 아빠가 보낸 카톡들. 아직도 이걸 꺼내 읽으면 숨이 안 쉬어진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퇴사한다는 딸에게 엄마가 남긴 카톡. 이런 그림까진 바라지도 않았지만... 왜 항상 위로는 남의 부모님께 받는지.


물론 다음 스텝에 대한 계획 없이 퇴사를 하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몸이 힘들고 마음이 힘들면 일단 휴식을 취하는 게 맞는 선택이다. 하지만 보다시피 나는 그런 걸 수용해주는 부모님 밑에서 큰 사람이 아니었고... 대책 없단 소리를 듣기는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미리 생각해뒀던 나의 계획은 이랬다:

1. 2년 정도 백수 상태로 공부하기 (무슨 공부인지는 비밀!)
2. 시험에 합격해서 IT업계를 탈출하기
3. 무작정 공부만 하면 늘어질 수 있으니까, 알바를 하면서 생활비에 보태기

(너무 MBTI P인 거 티 나는 계획)


우선 IT업계를 벗어나고 싶었다. 지난 글에서도 말했듯이 직장생활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깨달았고, 그래서 더 이상 커리어에 대한 욕심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너무나 힘들게 한 IT업계에 더 이상 남고 싶지 않았다. 서비스기획자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싶었다. 한때는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꼴도 보고 싶지 않은 연인처럼. 물론 약간의 도피성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번아웃과 우울증에 절여져 있었고, 그래서 고통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이 강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런 계획 아래 어찌어찌 퇴사 일자를 잡고, 인강을 결제하고, 참고서를 주문했다. 그러고 나니 알바를 구하는 일이 남았다. 그동안 번아웃으로 인해 받았던 스트레스와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내가 하는 일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기에,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좀 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나는 영어를 잘했다. 대학생 때 영어 강사로 일해본 경험도 있었다. 선생님만큼 보람이 가시적인 직업이 있을까. 알바몬에 채용공고를 올렸다.


30대가 되어서 알바몬에 이력서를 올리는 건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괜히 회사에서의 경력을 언급하면 업계와 관련된 공고만 추천될 것 같아서, 일부러 회사에서의 경력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학교 때 강사 1년, 과외 경험 다수. 같은 흔해빠진 자기소개를 썼던 것 같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돈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적당한 곳에서 보조교사를 하며 받는 만큼만 일하고 싶었다. 이런 욕심없음이 무색하게 연락이 쏟아졌다. 대학생 때는 과외 자리 하나 구하기 그렇게 힘들었는데. 경험이 거의 없어도 그래도 나이가 일단 많고 보는 게 사교육 시장에서는 더 먹히는 모양이다. 다행히 좋은 커리큘럼을 운영하는 학원을 운 좋게 만났다. 간단한 면접을 보고, 손쉽게 첫 출근일이 정해졌다.

                    

저출생이라지만 한국 사교육 시장은 아직도 건재하다...


그렇게 정식 퇴사 일자가 되기도 전에 알바를 구할 수 있었다. 이제 퇴사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2021년 4월 5일. 나는 공식적으로 백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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