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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네오 Nov 04. 2022

이만하면 감사하지

누가 욕실 바닥에 휴지 놔뒀어!

안방 화장실...

끝이 뜯어지지도 않은 새 두루마리 휴지 하나가 덩그러니 굴러다닌다.


누가 휴지를 화장실 바닥에다가 던져놨어!!!!!


우리딸의 정의를 빌자면 개념없는 초딩을 일컷는다는 잼민이를 둘 씩이나 집에서 키우고 있는상황에 이렇게 있어야 할 것이 제 자리에 없고, 없어야 할 것이 그 자리에 머무는 경우가 크게 이상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난 또 뇌를 거치지 않는 샤우팅으로 잔소리를 장전한다.


 거칠기 짝이 없는 내 샤우팅에 동요되지 않는 평온하고 한없이 느릿한 목소리가 내 뒷통수를 친다. 


그거... 거기 있는 것만으로 엄청 감사해야하는거야...


순해빠진 우리 아들의 목소리... 이건 또 모슨 소린가? 

얘는 항상 이런식이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더 명확하고 확실한 프레임으로 뒷 일 생각하지 않고 내질러 사람을 열받아 팔짝 뛰고싶게 만드는 우리 딸과는 달리 이녀석은 아무리 화를내고 야단을 쳐도 속을 모르게 입꾹 다물고 스펀지처럼 나의 화를 받아먹어버리고는 끝내버리는 통에 성질부린 내가 머슥해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닌다. 


저 한 마디에 다 담겨 있다. 

화장실 갔을 땐 휴지가 없어서 자신은 매우 당황했다. 욕실장에도 휴지가 없어서 당황했을 아이가 창고를 뒤져 휴지를 갖다 욕실에 갖다두었으니 얼마나 넓은 아량과 배려인가... 휴지가 저기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한 일인가? 

나는 왜 상황도 모르고 요란을 떠는 잼민이 엄마짓을 하고 있나...


순간 사과할 뻔 했다. 

아이의 말처럼 엄청 감사할만한 상황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욱할 상황도 아닌 매일매일의 모든 일들에 감사하기로 마음먹지 않은 이상 내 생의 모든 일들이 분노와 원망으로 끝나겠지?


그나저나 저 무르익는 열세살 저녀석은

사춘기가 어디로 오고 있어서 

사춘기 이기는 질풍노도의 갱년기 엄마 앞에서

저런 보살님같은 소리를 하는걸까?


내가 낳았지만, 나같지 않아서

내가 낳은 또 다른 녀석과도 너무 달라서

경이롭고 부담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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