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거지의 때깔

그린델발트, 인터라켄, 슈피츠

by 시옹
7일의 스위스

처음 스위스 그린델발트에 도착했을 때의 충격은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급이었다. 이런 데가 실존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서울을 도망쳐 나와 스위스 거지라도 했을 텐데,라는 철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린델발트는 융프라우 요흐에 가기 위해 들렸던 마을 정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에겐 융프라우 설산보다 더 오랫동안 잔상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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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모든 게 말도 안 되게 비싸서 그렇지 교통은 정말 편리하고 쉽다. SBB라는 앱을 통해 기차시간을 보고 미리 예약할 수 있는데, 관광객들에게는 거의 관람열차와 같다. 기차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순간의 풍경이 모두 그림이다.




인생 처음으로 간 만년설 쌓인 융프라우도 물론 너무 좋았지만, 그린델발트는 그저 살아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분명 가성비를 따진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는데도 뷰가 이렇게 환상적이었다. 무료 조식의 오렌지 주스는 오렌지 알이 한 올 한 올 느껴지는 듯했고, 치즈는 옆집에서 갓 만들어 나온 것처럼 신선했다. 적어도 내 느낌은 그랬다. 물가가 너무 비싸서 6박 7일의 스위스 여행 동안 단 한 번도 식당에서 밥을 먹어보진 못했지만, '재료 본연의 맛'을 철부지 20대 초반인 나에게 처음으로 깨닫게 해 준 곳이 스위스였다.

이런 좋은 기억들이 모여서, 주변에서 아무리 '아무것도 없는 그런 곳에 왜 가?"라고 질문해도 자연이 지배한 나라들로의 여행을 고집하는 나를 만들었다.




놀랍게도 그린델발트 숙소에는 여러 한국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역시 치밀한 서칭의 민족) 샤워하러 가는 길에 섬세하고 빽빽하게 충전되고 있는 휴대전화와 보조배터리를 보고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다. '이건 누가 봐도 한국인의 작품이다' 싶었기 때문. 머나먼 타국에서도 그들의 존재감은 조용하지만 확실했다.

"혹시 충전 필요하시면 한 꼭지 쓰셔도 되어요!"

그들의 조건 없는 선의에 너무 감사했고, 이게 뭐라고 애국심까지 들었다. 나도 저런 한국인이 되어야지.







지브리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저주에 걸려 늙어버린 소피가 움직이는 성을 잠시 강가에 멈춰두고 빨래를 말리며,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강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한순간에 젊음을 잃은 소피가 강을 보면서 행복한 생각만을 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이 나에겐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다. 잔잔한 일상 속에 그 어떤 자극적 영상보다 만족감을 채워주는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곁을 지켜주는 꼬마 마법사 마르클과 카루시파. 나도 스위스의 푸른 언덕에 앉아 소피를 흉내 내려 해 보았다. 물론 내 옆엔 아무도 없었지만. 아 그렇구나. 아름다운 것은 나눌 사람이 있어야 더욱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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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꿈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하늘을 날고 싶다'는 망상에 가까운 꿈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 당연히 농담이라 생각한다. 혹은 비행기 타기, 스카이다이빙, 번지점프 등을 좋아하냐고 물어보곤 한다.

그런 게 아니라며 웃으며 넘기지만, 나는 기계 따위의 힘을 빌리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스릴을 느끼고 싶은 게 아니다. 내 날개를 가지고 나의 힘으로 자유롭게 하늘을 누비고 싶다. 그래서 결국 이번 생에 무엇을 해내더라도 내 꿈을 이루긴 어려운 것이다.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생애 첫 패러글라이딩을 도전하며 그 이룰 수 없는 꿈에 아주 조금 다가가는 간접체험을 할 수 있었다.

"분더쉔(Wunderschön)"

독일어로 아름답다는 뜻이란다. 패러글라이딩을 태워준 마틴에게 배운 말이다. 다음 생에는 하늘의 왕 독수리로 태어나고 싶다는 그의 말에 나이, 성별, 인종을 넘어선 강렬한 동질감을 느꼈다. 여기 다음 생의 꿈을 꾸는 사람이 또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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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켄에서 유람선을 타고 청록빛 튠 호수를 건너면 작은 마을 슈피츠에 갈 수 있다.

융프라우 VIP 패스 안에 유람선 왕복 티켓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VIP 패스를 구매한 많은 한국인들이 슈피츠를 찾는다. 그래서 이보다 이국적일 수 없는 스위스 유람선 안에서도 쉽게 한국어를 들을 수 있었다.

해외여행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건 참 양가적인 감정을 준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해외까지 와서 한국인들과 함께해야 함에 답답하면서도, 혹여 난처한 상황이 생기면 한국인들만큼 대처가 빠른 민족이 없기에 한편으로는 의지가 되기도 한다. 2018년 당시엔 몰랐지만, 점점 모험이 곁들여진 여행을 좋아하게 된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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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동화 같은 집들이 모두 튠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간 페인트 위에 고동색 지붕, 파란 페인트 위에 회색 지붕, 어쩌면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취향이 듬뿍 담겼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여러 색과 모양이 통일성 없이 모여있는데도 그 자체로 조화롭다. 내 집의 페인트색 같은 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도, 골라본 적도 없는 나에겐 이 집들은 픽션에서나 존재했던 동화 속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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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취향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단순히 몇 박 며칠의 일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진하게 알아가는 여정이다.

그래서 여행에도 정답이 없다. 무엇을 하든, 그저 일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여행은 충분하다. 그렇게 평생의 숙제인 나를 알아갈 테니.



Grindelwald, Switzerland_ Key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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