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체르마트 & 고르너그라트
7일의 스위스
혼자 여행을 하고 나서 돌아가는 숙소는 아늑해야 한다. 사실 철저히 타이트한 예산 안에서 선택한 가성비 숙소에서 집과 같은 아늑함을 기대할 순 없지만, 최소한 스스로의 기준에 부합하는 숙소를 선택해야 한다.
나의 경우 안전, 역세권, 청결도를 가장 중점적으로 보고 숙소를 결정한다. 작은 동양인 여자로서 싸다고 안전하지 않은 숙소를 고를 만큼 대담하진 않고, 시간이 소중한 여행인 만큼 이동거리의 효율성을 위해 역이나 정류장 근처의 숙소에 가산점을 준다. 그리고 이건 나만의 고집인데, 최대한 벌레 없는 깨끗한 숙소를 고른다. 바선생, 거미교수, 개미학생들... 너무 무섭다. 사실 웃기다. 20개 나라 40개 도시를 넘게 혼자 여행한 여자가 고작 벌레를 무서워한다니. 부끄러워 마땅하다. 하지만 어떡하나, 사람보다 다리 많은 벌레가 더 무서운 걸?
그런 면에서 스위스 체르마트(Zermatt)의 호스텔이 가장 머물기 쉽지 않은 숙소였다. 그만큼 다른 곳들에 비해 훨씬 저렴했으니, 내 손으로 저지른 만행이었다.
체르마트 호스텔의 첫인상은 수많은 나무 계단이었다. 26인치 캐리어를 낑낑 들고 올라가니 그제야 호스텔 정문이 보였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쓴맛은 단맛과 함께했다. 기차역에서 가까운 호스텔 덕분에 체르마트 시내 분위기도 느끼고, 유럽에서 온 또래 여행객들도 정말 많이 만났다.
특히 호스텔에 들아가자마자 마주친 동갑 스위스 남자애가 기억에 남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허리춤에 수건 한 장만 두르고 있었기 때문.
체르마트는 산악열차를 타고 고르너그라트(Gornergrat) 산에 올라가기 위해 방문했던 만큼, 짐을 풀고 바로 기차역으로 향했다. 고르너그라트는 해발 3,135m의 산으로, 스위스 알프스에서 가장 상징적인 파노라마 전망을 자랑하는 곳 중 하나다. 특히 마터호른(Matterhorn)을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체르마트에서 고르너그라트로 가는 산악열차(Gornergrat Bahn)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야외 열차라고.
체르마트에서 고르너그라트까지는 편도 총 40분 정도가 걸린다.
KTX를 타본 사람들은 한국 지방의 자연 풍경도 상당히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스위스 산악열차의 전망은 상상을 초월한다. '1시간 연속 힐링 자연 영상'과 같은 제목의 유튜브 영상에서 등장할만한 거짓말 같은 자연 풍경이 펼쳐진다.
없던 여유도, 없던 사랑도 몽글몽글 샘솟는다. 2018년 22살 당시의 나는 사랑을 이해하기엔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제대로 된 연애는커녕 짝사랑도 한 적이 없었으며,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 또한 어린 나에겐 너무 어려웠다. 그럼에도 체르마트 산악열차 안에선 '이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40분 동안 내색 없이 아름다운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스위스를 짝사랑하게 되었던 것 같다.
한여름인 7월에도 고르너그라트 정상의 날씨는 꽤나 쌀쌀했다. 후리스나 경량패딩 정도는 입어야 하는 날씨였다.
고르너그라트에서 볼 수 있다는 그 유명한 마터호른의 정체는 바로 이 토*론 초콜릿에 박힌 산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배낭에서 주섬주섬 미리 챙겨놓은 초콜릿을 꺼내서 눈앞에 펼쳐진 '진짜'와 비교해 본다. 정말 똑같이 생겼다.
이게 왜 그리 해보고 싶었을까. 여행은 이런 작은 오기에서 시작되나 보다. 유럽 여행은 특히 혼자서 떠난 첫 해외여행이었기에 모든 걸 '정석'으로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이상한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계획에서 벗어나 몸으로 부딪혀보니 그런 관념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여행에 정해진 기준이 어딨어. 인생도 한 치 앞을 모르는데, 행복하면 그만인 것을.
광활한 산들 사이로 CG(Computer Graphics)처럼 열차가 지나간다. 열차의 색을 빨간색으로 정한 사람을 찾아 칭찬해주고 싶어진다.
기찻길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인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지구는 원래 이렇게 아름다웠었구나.
고르너그라트에 올라간다면, 그곳에서 바로 열차를 타지 말고 한 정거장 정도 걸어 내려오는 걸 추천한다. 고르너그라트 바로 전 역은 로텐보덴(Rotenboden)인데, 하산길이라 힘들지도 않고 내려가는 내내 기막힌 자연 풍경을 볼 수 있다.
나무 한그루 없는 바위산을 걸어 내려가다 보면, 주위를 멋지게 장식한 하얀 설산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 분명 내가 걷고 있는 이 산은 푸르른데, 저 산들은 대체 얼마나 멀고 높기에 7월에 눈이 쌓여있을까? 인간은 하찮고 자연은 위대하다는 사실을 어떤 광고보다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하산길엔 오로지 나밖에 없었다. 마주친 생명체는 주인 모를 양 떼들이 전부였다.
당연히 순간순간 '여기서 길을 잃으면 어떡하지?'와 같이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이만큼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자연이라니! 잠깐이나마 스위스 산에 마음껏 뛰어노는 동물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외로워서 불안했고, 고독해서 평온했다.
행복했다.
Zermatt, Switzerland_ Key Word
- Gornergrat
- Rotenboden
- Matterhorn
- Toblerone Chocolate
- Gornergrat B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