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리기산
7일의 스위스
스위스에 가서 '스위스 패스(관광 교통 패스)'를 사용한다면 리기산을 꼭 가야 된다는 말이 있다. 스위스 패스 없이는 배를 타고, 열차를 타고, 케이블카를 타는 모든 이동 수단이 살 떨리는 가격이기 때문이다.
스위스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골머리를 앓게 한 것은 역시 스위스의 악명 높은 물가였다. 나는 여행자로서 이동이 잦을 수밖에 없는데, 한번 이동할 때마다 하루 예산의 반이 날아갔다. 스위스 패스 덕분에 루체른(Luzern)에서 피츠나우(Vitznau)로 가는 유람선을 탔다.
지극히 아름다운 경치와 지독히 고통스러운 물가의 나라, 스위스.
피츠나우에 내려 리기 쿨름(Rigi Kulm)으로 가는 톱니궤도열차를 타러 갔다. 유람선에서 한 시간 동안 굶주림 속에서 버티던 터라 피츠나우역에 내리자마자 편의점에서 재빠르게 샌드위치와 딸기우유를 샀다. 푸석한 빵 안에 소스는 거의 없고 치즈와 햄 몇 장이 깔려있었다.
스위스에서는 단 한 번도 식당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2018년 당시의 스위스도 감히 내가 식당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물가가 아니었다. 스위스인들의 입장에서 나는 거지와 시민 그 사이 정도 되었을까. 늘 쿱(Coop)마트나 편의점에서 음식을 사서 이동하는 길에 먹거나 야외에 그냥 앉아서 먹었던 기억이다. 스위스에서는 기차에서 음식물 섭취를 잘 안 하는 건지, 그저 내가 운이 안 좋았던 건지, 기차에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엄청나게 눈치가 보였던 것이 아직도 생각난다. 서러웠다. 저도 식당에서 여유롭게 식사하고 싶다고요.
나라마다 에티켓은 다르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상식은 만국 공통이라 믿고 싶다. 예를 들어 공공장소에서는 너무 냄새나는 음식 먹지 않기, 너무 시끄럽게 떠들지 않기 등. 해외에서 몇몇 눈살 찌푸려지는 외국인들과 한국인들을 목격하면서, 나는 절대 어글리 코리안이 되지 않아야겠다 다짐한다.
리기 슈타펠(Rigi Staffel), 리기 칼트바트(Rigi Kaltbad) 등의 역을 거쳐 최종 목적지 리기 쿨름역에 도착했다.
열차에서 내리니 스위스의 광활한 산맥들과 함께 7월의 초록빛을 가득 담은 리기 산이 반겨준다. 작고 알록달록한 꽃들이 여기도, 저기도 한아름이다. 한눈에 담기 힘든 아름다운 경치에 눈이 멀어서 햇살이 뜨거운 줄도 몰랐다. 맑은 공기와 탁 트이는 시야에 순간 라식 수술을 하고 광명을 찾았던 그 순간의 짜릿함이 다시 느껴졌다. 이것이 스위스구나!
한국 국토의 약 70%가 산지다. 여느 한국인처럼 어릴 때부터 설악산, 관악산, 강원도 등에 놀러 다녔던 나에게 이런 산들의 풍경은 익숙할만하다. 그러나 리기 산의 전경은 너무나 낯설었다. 동화처럼 싱그러운 연둣빛 잔디 위에 빨간 지붕의 집, 그리고 그림처럼 몽글몽글한 하얀 구름과 그와 명확히 구분되는 파란 하늘.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처음 혼자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런 전경만 보면 그동안 속고 산 것만 같은 이상한 배신감을 느꼈다. 내 세계가, 내 사회가 전부인 줄 알고 그에 맞추기 위해 20년을 노력했는데. 지구에는 이런 곳도 존재했구나. 모든 세상이 빠른 인터넷과 힙한 트렌드와 뛰어난 스펙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구나. 20년 동안 달려왔던 나에게 스위스는 쉼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정말 재밌는, 하지만 다시는 보지 못하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리기 산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두 눈에 새겼다. 이 신선한 공기를 기념품처럼 가져가고파서, 폐가 허락하는 만큼 큰 숨을 들이키며 리기 쿨름역에서 전전 정류장인 리기 칼트바트역까지 걸어내려 갔다. 리기 산은 이제 막 혼자 여행을 시작한 나보다 더 내가 원하는 여행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삶의 선명함과 생명의 생생함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 그것이 내가 여행하는 이유였다.
2시간 정도 걸어 내려오니 리기 칼트바트역에 도착했다. 리기 산의 투머치 산소에 취했는지 기념품이란 걸 2만 원어치나 사버렸다. 20대 초반에는 여행 가는 나라마다 키링을 사서 모아야겠다는 이상한 수집욕이 있었다. 누구든 여행 간 나라를 수집해서 품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맥주병 뚜껑을 모으고, 누군가는 티스푼을, 누군가는 냉장고 자석을 모은다. 단발성인 여행을 오래 기억하고 남기고자 하는 노력일 것이다. 나 또한 그래서 처음엔 키링을 모으다가, 생각해 보니 나는 평상시 키링을 전혀 쓰지 않았다. 수집만을 위한 수집이란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더 이상 사모으지 않게 되었다. 더군다나 요즘은 소셜미디어가 잘되어있어서 굳이 현물 기념품을 살 필요성이 줄어든 것 같다.
20분 정도 케이블카를 타고 리기 칼트바트역에서 작은 마을 베기스(Weggis)까지 내려왔다.
만약 내가 지금 스위스를 방문한다면 이런 작은 마을들에게 좀 더 관심을 줄 것 같다. 유명 관광지를 도장 깨기 하는 실속형 여행도 좋지만, 오히려 느긋하고 편안하게 즐기는 나만의 여행지가 더 진하게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베기스에서 다시 루체른으로 가는 유람선에 올랐다. 스위스는 유럽 사람들 중에서도 노년층에게 인기가 많은 나라인 듯싶었다. 백인 관광객들의 대부분이 어르신들이었다. 아, 청년들은 지갑 사정 때문에 오지 못하는 걸 수도 있겠다.
리기산을 끝으로 스위스 여행이 마무리가 되었다. 한 달간의 유럽 8개국 여행 중 일주일이라는 가장 긴 시간을 보낸 것이 스위스였다. 그마저 너무 짧고 강렬하게 느껴졌다. 내 여행의 퍼스널 컬러는 Green이란 것을 잘 관철시켜 준 곳. "어디가 제일 좋았어?"라는 전형적인 질문에 주저 없이 답할 수 있는 경치를 선물해 준 곳. 앞으로 이어지는 내 20대의 여행에 나침반이 되어준 고마운 곳.
나 또한 발걸음이 느려지는 노년기에 다시 이 땅을 밟기를 소원해 본다.
Rigi, Switzerland_ Key Word
- Luzern
- Vitznau
- Coop
- Rigi Kulm
- Rigi Staffel
- Rigi Staffelhöhe
- Rigi Kaltbad
- Wegg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