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그랜드 캐니언
자연경관을 좋아한다면 미국 서부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바로 그랜드 캐니언! 혼자서 자유여행으로 미서부를 가게 되면 주요 도시와 거리가 있는 그랜드 캐니언을 가기 쉽지 않다. 그래서 주로 그랜드 캐니언과 요세미티 국립공원과 같은 곳은 라스베이거스,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도시에서 투어를 잡아 떠나곤 한다.
나도 미리 투어를 예약해 둔 덕분에, 전날 새벽 4시까지 라스베이거스 클럽에서 서성이던 내가 2시간 뒤엔 자이언 캐니언(Zion Canyon)으로 향하는 봉고차에 타있었다.
가이드님의 설명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봉고차 한편에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투어객들은 아침 일찍 집합이었는데도 상당히 활력 있어 보였다.
봉고차가 멈추는 진동에 깨어서 밖을 바라보니 벌써 자이언 캐니언에 도착해 있었다.
차 문을 열고 나가자 3월 말인데도 여전히 차가운 유타 주(State of Utah)의 아침 바람이 불어왔다. 비몽사몽 눈을 비비며 밖을 보니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의 산이 멀리까지 뻗어있었다. 층층마다 선명한 색과 질감을 가진 자이언 캐니언이었다. 고등학교 과학시간에 배운 '퇴적작용', '산화작용' 따위의 용어들이 떠올랐다. 물론 자세한 것들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암석이 건조해서 마구 올라가기 좋겠다,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
다음 목적지는 애리조나 주(State of Arizona)의 앤텔로프 캐니언이었다.
인터넷에 그랜드 캐니언을 검색하면 나오는 예술 같은 협곡의 굴곡 사진들은 다 여기서 찍은 것들이다. 앤텔로프 캐니언은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 안에 위치해서, 네이티브 아메리칸 가이드의 안내 속에서만 입장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입장료를 내지 않은 한국인 가이드분은 차에 남으시고, 네이티브 아메리칸 직원이 영어로 협곡 가이드를 해주었다.
본격적으로 앤텔로프 캐니언으로 들어가기 전인데도 주변 경관이 너무 아름다웠다.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빌딩들과 도시 불빛을 보다가 탁 트인 벌판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사방으로 산 하나 없이 펼쳐진 벌판이야말로 광활한 미국 땅에서나 볼 수 있는 진귀한 광경이 아닌가 싶다.
자이언 캐니언은 협곡 사이사이가 멀어서 마치 산맥을 보는 느낌이었다면, 앤텔로프 캐니언은 좁은 바위 틈새로 들어가서 탐험하는 슬롯 캐니언(Slot Canyon)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래서 협곡의 틈새로 들어가기 위해 아슬아슬한 계단을 내려가서 투어를 시작하게 되는데, 협곡 사이로 들어가는 순간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좁은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굴곡진 협곡의 벽면에 부딪히고 반사되면서 부드러운 주황빛 그라데이션이 일어났다.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거짓말같이 파랗게 선명했다.
눈으로 보는 맛도 있었지만 진가는 사진을 찍을 때 발현했다. 네이티브 아메리칸 가이드가 능수능란하게 나의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찍는 족족 컴퓨터 배경화면에서 한 번쯤 본 것 같은 예술 작품이 탄생했다.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전문 카메라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찍을 수 있다. 이게 보이는 그대로의 사진이기 때문.
뜻밖의 놀라운 광경을 선사했던 곳은 바로 다음으로 도착한 홀스슈 밴드였다.
마치 태곳적 말(馬)이 그의 발자국을 남겨놓은 것 같았다. 선명한 말발굽 모양의 사암층 지형 아래 콜로라도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강원도 영월군 선암마을의 한반도 지형이 떠오르기도 했다.
절벽 아래를 쓱 훑으며 강물을 내려다보니 순간 아찔했다.
내가 방문했던 2019년 3월 말은 그랜드 캐니언에서 한국인 관광객이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서, 가이드님의 신신당부가 없었더라도 다들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관광을 하는 분위기였다. 내가 포즈를 잡고 사진 찍은 곳도 사진상으로는 바로 아래가 낭떠러지 같지만, 사실은 밑에 다른 언덕이 있는 사실상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여행을 좋아하는 자들은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을 때 솟구치는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을 알 것이다. 아팠던 다리통증도 잊히고, 허기졌던 배도 잊게 되는 마법이다. 나 또한 일몰에 붉게 타오르는 절벽을 보며 어제 라스베이거스 클럽에서부터 쌓여왔던 피로가 싹 가시며 순간 온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참, 그래도 발은 헛디디면 안 된다는 점!
긴 하루의 일정을 끝내고 캠핑카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하루 종일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여행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다른 투어객들과 친숙해져 있었다. 어쩔 때 보면 이렇게 만난 사이에서 이렇게까지 진솔한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때도 있다.
투어사에서 준비한 삼겹살과 김치찌개, 그리고 맥주와 함께 알찼던 하루의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드디어 미국 서부 로드트립의 하이라이트, 그랜드 캐니언을 마주했다.
사실 어제 보았던 협곡들도 충분히 광활하고 아름다워서,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해봤자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이곳이 과연 내가 아는 지구가 맞는가!
근원적인 경외감을 주었다.
자연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뇌리에 박아주는 전경이었다. 초록색, 보라색, 황토색 등의 퇴적물들이 차곡차곡 쌓인 지형이 끝도 없이 펼쳐져있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언젠가 꼭 전망을 좋아하시는 아버지와 광활한 자연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꼭 모시고 오고 싶은 곳이었다.
쌀쌀한 아침 바람에 몸을 비비며 림 트레일(Rim Trail)을 걷다 보니, 여기저기서 풀을 뜯고 있는 커다란 동물이 눈에 띄었다. 생긴 건 꼭 사슴 같았는데 덩치는 소보다 더 큰 이 동물들은 엘크(Elk)나 뮬(Mule)이라고 한다. 그들의 터전에 인간이 눈치 없이 관광지를 만들어놓은 것처럼, 이들은 눈앞에 관광센터가 있든 셔틀버스가 다니든 신경 쓰지 않은 채 유유자적 풀을 뜯었다.
미서부 로드트립을 하면서 빼먹으면 아쉬운 루트 66(66번 도로)에도 들렸다.
미국 최초의 대륙 횡단 도로 중 하나인 이 길은 '미국 길의 어머니(The Mother Road)'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 피어(Santa Monica Pier)에서 마주쳤던 루트 66가 끝나는 지점을 알리는 표지판(End of the Trail)을 보고 난 후 두 번째로 이 길을 마주한 곳은 셀리그먼(Seligman)과 킹맨 (Kingman)이라는 마을들이었다.
길을 따라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빈티지 자동차들과 오래된 이발소, 기념품 가게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미국의 66번 도로에 대해 그 어떤 옛 추억도 없는 나조차 알 수 없는 노스탤지어에 빠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익살스러운 간판들과 상점 기념품들을 구경하다가 참지 못하고 하얀 캡모자를 사버렸다.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네바다 주에서 시작해 유타 주, 애리조나 주를 여행한 후 다시 네바다 주 후버댐에 도착했다. 그렇게 30시간의 미서부 로드트립 투어가 끝이 났다.
2019년의 나는 국내 운전면허도 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이때 가이드님을 따라 미서부 곳곳을 여행하면서 로드트립에 대한 첫 관심이 생긴 것 같다. 움직이는 숙소와 함께 언제 어디서든 내 마음대로 멈춰서 자연을 감상하고, 내 마음에 따라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여행. 이런 관심의 씨앗들이 모여 서른 중반쯤에는 내가 운전하는 미국 로드트립을 떠날 수 있을까, 상상해 본다.
Grand Canyon, Arizona, The United States_ Key words
- Zion Canyon
- Antelope Canyon
- Horseshoe Bend
- Grand Canyon National Park
- Route 66 (Seligman, Kingman)
- Hoover D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