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바다, 바람, 그리고 와인
올해 여름 들었던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글쓰기 수업이라는 매개가 아니었다면 쉽사리 마주하지 않을 세상에 속한 이들이었다.
서울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다 뛰어난 목공 예술가인 남편과 함께 강릉에 꿈 그 자체인 집을 지어 꿈 속에 살고 있다는 Y, 그 꿈 속으로 닿아보려 홍천 외진 마을에 자신만의 터를 막 짓기 시작한 K, 수직적인 조직 생활에 수많은 생채기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잠시 쉬어가던 H, 고양이를 너무나도 사랑하며 노마드의 삶 어딘가에 다가가고 있는 J,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구보다 상업적인 일을 하며 얕은 내가 그 인원에 속했다.
우리는 각자에게 닿으려면 최소 2시간 이상 달려가야 하는 거리에 산다. 강원도 강릉, 경기도 성남, 강원도 홍천, 경기도 광주, 성수 등 중간 지점을 잡으려면 서로에게 닿는 선을 그어서는 도저히 만나는 지점이 겹쳐지지 않아 결국에는 [서울역]이라는 핵심 교통지에서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 스치듯 지나갈 수도 있던 이들과의 인연을 어떻게든 붙잡고 이어가는 이유는 이들을 만나고 오는 밤이면 매번 들뜬 마음에 잠도 못 이룰만큼 행복했다. 그래서 모두가 자신만의 세상에서 가장 바쁜 일상을 가꾸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두어달에 한번씩 자리를 만들었다.
주로 에너지 넘치는 내가 손을 건네면,
제법 고양이 같은 그녀들이
수줍게 손을 뻗어주는 방식의 만남.
그럼에도 누구 하나 어깃장을 놓거나 싫다는 내색은 없으니까 저 고양이들도 내가 좋은가보군-하며 집사의 마음으로 그들과의 만남을 정성스레 꾸리곤 했다. 그렇게 서너번 더 마주하고 나서, 서로를 애틋해 하게 된 우리는 강릉 여행을 계획했다. 앞서 말한 강릉에 자리잡은 Y의 공간, 수차례 그녀의 글에서 마주한 스틸크로그에 가기로 약속했다.
여름이면 탐스럽게 열린 배롱나무가 심긴 정원이 있다는 그 곳,
여름 밤 느즈막히 모래사장으로 달려가 바다를 배경으로 와인을 마신다는 그 곳,
때로 좋아하는 이들을 자신이 만든 펍으로 불러 이야기를 안주삼아 늦도록 이야기 나눈다는 그 곳.
그녀의 글을 통해 수차례 마주한 덕에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멋대로 조각조각의 이미지를 이어붙여 머릿 속으로 수번을 그린 곳이다. 5명의 인물들이 시간을 맞추려면 제법 오래부터 시간을 비워야 한다. 가을부터 여정을 계획해두고 그 날까지 하루하루 꼽으며 살았다. 감사하게도 모두가 한 마음으로 들뜬 공기를 가지고 살았나보다. 아침부터 강릉으로 달려가자는 K의 제안 덕에 차갑게 내려앉은 겨울 공기를 가르고 집을 나섰다. 두둑하게 싼 캐리어와 가방을 메고 강릉으로 출발한다. 기차를 타고 가는 여행, 정말 오랜만이다.
바깥으로 펼쳐지는 한적한 풍경이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며 250km의 시속으로 지나간다. 빽빽히 아파트가 자리한 동네를 지나, 휑한 타이어 가게만 드문드문 놓인 동네를 지나, 제법 드넓은 자연이 펼쳐지는 동네로 닿아간다. 꿈꾸던 곳으로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최근에는 여행 마저 사치인 것 같아 한동안 여행을 그리지 않았는데 이번 여행은 정말 기대가 됐다. 마음이 맞는 이들과의 대화가 기다려져서 그 공간에서 나눌 우리의 추억이 기대돼서 소풍이라도 앞둔 아이마냥 며칠을 설레어했다.
강릉으로 달려가는 순간이 마치 꿈 속에서 유영하는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설렜을까, 왜 이렇게 좋았을까, 강릉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번뜩 알게 됐다. 강릉 중앙동에는 한 집 건너 한 집 마다 저마다의 색깔로 아름답게 가꾼 공간이 밀집해있었다. 자신만의 색깔을 내기 위해 자연만이 가득한 도시로 내려온 사람들, 이들이 모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술을 행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강릉은.
강릉역에서 내려 Y의 공간으로 가기 전까지 장장 3시간 정도의 시간을 소품샵, 공예샵, 서점 등을 유유히 구경했다. 매 공간에서 ‘어머’와 ‘예쁘다’의 남발로 혼을 쪽 빼앗긴 채 택시에 올랐다. 그 와중에 수많은 감탄과 영감에 압도된 나는 택시에 타자마자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Y는 이렇게 영감과 아름다움에 심취해 지쳐버릴 우리를 알았는지, 세심하게도 모두가 각자의 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숙소의 모든 예약을 비워 두었다. 각자의 공간에서 달디 단 쉼을 가지고 우리는 Y가 숱하게 말해 온 펍에 둘러 앉았다. Lignum Pint. 더 이상 영업은 하지 않는다는 펍은 Y와 Y의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리그넘파인트에는 한번 앉으면 수시간을 이야기하게 되어 블랙홀이란 애칭이 붙은 탁자가 놓여 있다. 나왕나무로 켜고, 거기에 흑색에 가까운 스테인을 진하게 입혀 정말 말 그대로 칠흙같이 검은 색을 띄는 원목 테이블이었다. 여섯시 무렵 그 곳에 둘러 앉은 우리는 새벽 한 시가 넘도록 서로의 한 해를 나누었다.
멀리서나마 글로 훔쳐본 이들의 이야기라 어떤 속사정을 꺼내놓아도 응원하고 싶은 이들이었다. 대화의 정점은 J가 가져온 [대화카드]가 장식했다. 이 이야기를 풀고 싶어 이렇게 기나긴 서술을 거쳤다. 우리가 켜켜이 쌓온 이야기와 감정을 알아야만 조금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기에.
당신은 어떤 사람을 곁에 두고 싶나요?
의지가 되는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영감을 주는 사람
이 질문이 나에게 당도했다. 무작위로 꺼낸 카드일진데 최근의 내 삶을 관통하는 질문 같았다. 생각보다 쉽게 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나는 내가 곁에 둘 누군가를 선택할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 본래 누구에게 의지하지 못하는 나는 여전히 믿을 건 스스로밖에 없다 믿어 왔으며, 사랑스러운 사람은 곁에 두기에 내가 그/그녀의 사랑스러움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고, 또 일상에서 쉬이 영감을 찾는 나는 영감을 주는 이가 없어도 괜찮았다.
그래서 그저 존재만으로 평온함을 주는 아름다운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자 대답을 듣고 있던 그녀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조금씩 생각이 달랐던 이들의 답도 모이고 모여 결과적으로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사람’을 곁에 두고 싶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아름다운 존재로 다시 한번 스스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결론에 당도했다.
안개낀 유리창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던 내 꿈이 조금은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곁에 두고 싶은게 아니라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거다, 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아름답다'라는 형용사가 품는 정의되기 어려운 요소들의 총체, 그 꿈에 부합하려고 매일 아주 조금씩이라도 행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내 곁에 두고 싶은 이들이 늘 나를 아름답게 바라봐주며, 덕분에 서로를 부여잡고 조금씩이라도 아름다움에 가까워질 수 있는 삶을 가지고 싶다.
이야기할수록 우리 모두의 꿈이 같아졌다. 직업이나 어떤 정량적으로 구현되는 형태가 다를지라도 우리의 궁극적인 꿈은 ‘아름다운 사람’, 그저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이렇게 살고 있었다. 이 질문을 지나며 우리는 서로에게 더 진한 동료애랄지, 우정을 느끼게 됐다. 시간이 늦어지며 어느 순간부터는 돌아가며 몰래 하품을 했지만 그 행복의 시간을 깨고 싶지 않아 모두가 눈을 또렷이 떠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 끝에 잊을 수 없는 몇가지 이야기를 앉고 숙소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 무해하며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곱씹었다. 그 날 나눈 이야기들을 꽁꽁 예쁘게 싸두고 종종 하나씩 까먹으며 2025의 나를 맞이 하겠다.
조용히 스스로를 찾는 여행을 떠나고 싶은 이라면,
차분하고 단정한 휴식을 꿈꾸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요.
-
강릉 스테이 <스틸크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