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21세기에 말도 안 되는 단어가 온 매체에 언급됐다. 세상에, 계엄령이란 말을 가장 최근 접한 매체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기념해 읽은 <소년이 온다>에서였다. 근대사에서 발생한 일일 뿐이었던 계엄이 현실의 단어로 다가왔다.
내 생에 이런 일이 오는구나.
이 상황이 종료되지 않는다면 나의 세상은 어떻게 되는걸까.
요즘은 저녁 열시만 되면 까무룩 잠이 들어버려서 그 무서운 계엄 소식도 다음날 계엄 해제 이후에야 알고 말았다. 어쩌면 운이 참 좋았다-싶다. 실시간으로 소식을 접한 이들은 잠들지 못한 채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나는 계엄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어물쩡 잊고 한 주를 살았다. 허무맹랑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니 오는 토요일에 열릴 탄핵안에서 너무도 당연스레 그가 하야되리라 믿었다.
그런데 계엄령 선포보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집권당인 국민의 힘(정말 힘 빠지게 하는 집단이 아닐 수 없다)의 대다수의 의원들이 자리를 뜨며 안건이 부결되어 버린 것이다. 의장에 남아있는 의원들 모두가 그들의 복귀를 읍소할 때에도 이들은 남아있는 누군가를 질책하며 국민의 마음을 져버렸다. 그제야 아득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나라를 단단히 지탱한다 믿었던 민주주의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존재였던가. 정녕 소년이 온다는 현실이 될 것인가.
계엄 선포와 두시간 뒤의 해제라는 어린애 장난 같은 소식을 다음날 한꺼번에 접하고도 몇날 며칠 잘만 살아가던 나는, 투표 부결 소식을 들은 날부터 매일 밤마다 핸드폰을 붙잡고 쉽게 잠들지 못했다. 오늘은 국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피느라 바빴다. 정치에 눈감고 소소한 일상에나 집중하던 나의 모든 SNS 알고리즘이 정치 색으로 퍼렇게 물들고 말았다.
온 국민이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유튜브에는 온 매체 채널에 라이브를 표시하는 빨간등이 들어왔다. 너나할 것 없이 국회의 어떤 당, 저떤 당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알고리즘이 안내 하는대로 몇개의 영상을 연달아 볼 수밖에 없었다. 누가 생각해도 말이 안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이야기, 모두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더 답답해졌다. 좋아하는 사람들이던 가족이던 정치 이야기는 나누는게 아니란 학습을 수차례 받아온 나는 친구들을 만나면 입을 다물고 말았지만, 저녁이면 온라인 세상과 일방적인 대화를 수도없이 나누었다.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그럼, 아무렴.
잠이 오질 않는 밤, 얼마나 소중한 밤잠인데 말도 안되는 인간 때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은근한 불안에 떨었다. 공교롭게도 근래 한강 작가님의 작품을 읽어 더욱 무서웠다. 하필이면 계엄과 그 뒤로 이어진 수많은 학살에 대한 이야기, 또 그 속에서 그 학살을 경험한 개인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담은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내가 잊고 살았던 시대에 아스라진 숱한 생명들이 안쓰럽고 미안해서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아이가 죽은 걸 인정하기 싫어 몇번이고 아이가 살아있을거라 부정하던 부모의 마음을 읽을 때면 참을 수 없어 책등을 잠시 덮고 쉼호흡을 해야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읽고 나니 현실 속의 내가 너무나 축복 받았다 믿었는데-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한번 그 많은 아픔과 사연을 다시 반복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 아찔했다.
모두가 당연히 가결될 줄 알았던 탄핵안이 국회의원 정수 부족으로 부결되었던 날, 국회 앞에서는 정말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였다. 소년이 온다의 배경이었던 광주에서는 수십 대의 대절 버스가 배차되어 서울을 향했다. 보통이면 텅텅 비었을 지역으로부터의 상경 버스도 모두 매진 행렬이었다. 9호선은 인파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여의도와 국회의사당을 경유하지 않고 지났다. 20대 소녀들과 30대 여인들은 제각기 아끼던 스타의 응원봉을 들고 모였다. 이런 소식이 쉴새없이 미디어를 통해 뿜어져 나왔다. 여전히 TV 속 뉴스는 제법 조용했지만, 개인이 미디어인 시대에 모두가 자신의 미디어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인터넷 저 편에서 이들을 조용히 응원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나라의 현실이 해외에 보여지는 것도 부끄러운데, 동시에 그 현장에 나는 직접 함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또 부끄러웠다.
얼마나 다들 추웠을까. 모두가 어떤 생각으로 그 현장에서 한 마음 한뜻으로 소리지르고 노래를 불렀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니 다음 집회에는 기필코 가고 말겠다고 다짐했으나, 다시 한번 모은 친구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나갈 수 없다고 답을 한 이후로는 너무나도 쉽게 포기해버렸다. 온라인에서 함께 갈 이를 찾을수도 있을텐데 여전히 나는 그만큼 용기내지 못했다. 그 많은 인파 속에 홀로 덩그러니 놓여지는게 두럽다는 핑계로, 대중교통이 모두 막혔다니 내가 갈 방법은 없을거란 자위로, 또 너무 추워서 오래도록 서있으면 아플만큼 추울 것 같다는 허무맹랑한 이유로 행하지 않았다.
스스로 부끄러워만 하고 있던 차에 진작 가결 되었어야 할 탄핵안이 가결됐다. 목소리 높여 소리친 국민들 등쌀에 못 이겨 정치인들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소녀들이 가장 고이 모시던 응원봉을 흔들며,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이돌 노래를 소리쳐 부르고 무식한 폭력에 섬세한 사랑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듯했다. 여전히 나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인데, 우리 나라에 수많은 소년 소녀들이 사랑으로 올바른 일을 행하고 있다니 벅찼다. 과거 광주의 그림자를 멀리서만 바라보아야 했던, 또는 그 이후에나 흔적을 살피던 이들이 나이가 들어서 그때의 소년들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운집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바뀌어도 소년, 소녀가 왔다.
참 공교롭게도 한강의 작품, 그녀의 문학들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그녀는 계엄과 탄핵이라는 사건 틈새에 수상 연설을 진행했다. 덕분에 모두가 이 계엄이란 문제에 더 달뜨게 반응했다. 얼마나 많은 우연과 실낱같은 확률이 곱해진 순간일까. 그녀의 말처럼 과거가 현재를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