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3 바티칸에서 우리의 집으로
2025.05.07. ~ 05.19. ROME – NAPOLI – SICILY (TRAPANI - PALERMO)
Siamo in luna di miele.
신랑 래리와의 부부로서의 첫 번째 여정이자, 첫 번째 공동 창작물인 《그와 - 그녀의 허니문 콘파냐》는 신랑 래리와 신부 체리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달리고, 걷고, 맛본 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의 언어로 같은 하루를 기록한 콘파냐처럼 달달한 글로, 결혼과 신혼여행의 뽐뿌가 조금이라도 생기길 바라며 글을 썼습니다.
신랑의 글 ⇢ https://brunch.co.kr/brunchbook/honeyconpann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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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과한 감정 표현을 드러내지 않는 신랑도 자꾸만 감탄사를 내뱉으니 자꾸만 내 광대가 올라간다. 내가 언젠가 느꼈던 경이와 감탄의 순간을, 내 반려자가 조금이라도 공유한다는 건 이런 기분인가 보다.
신혼여행을 위해 덜컥 이탈리아행 티켓을 끊고 나서야 2025년이 천주교에 아주 큰 의미를 가지는 희년(Year of Jubilee)*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보통 희년은 전년 7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이어지는 기간을 일컫는데, 천주교의 최고 기관이 놓인 바티칸이 있는 로마는 이 희년 기간 전례 없을 수의 방문객을 품는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의 결혼식을 2주 앞두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했다. 추모와 곧 이어질 콘클라베(교황 투표 기간)를 기리기 위한 온 세계 천주교인들이 로마로 몰려들었다. 바글거리는 로마와 바티칸 일대가 뉴스에 비칠 때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천주교가 아닌 우리에게 이 경조사는 여행을 방해할 요소일 뿐이었다.
*희년이란 성경에 나오는 규정으로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마다 돌아오는 해를 의미한다. 이 기간에는 빚이 탕감되고, 팔렸던 자신의 땅과 집과 몸을 회복하게 되는 해를 상징한다. 1475년부터는 모든 세대가 희년을 한 번 이상 누릴 수 있도록 25년 주기로 단축됐다고 한다.
안 그래도 '소매치기'와 '히피들의 사기'로 악명 높은 도시에 더 많은 인파가 몰린다니, 찾아볼수록 당장이라도 여행지를 바꿔야 할까 갈등했다. 행복해야 할 신혼여행에서 눈물과 분노로 얼룩진 경험을 하게 되면 어떡하나, 여러 고민이 오갔지만 당장 앞둔 결혼식 마저 머리가 아팠다. 결국 무수한 걱정을 품고 로마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16시간의 기나긴 여정 끝에 로마에 도착. 다행히도 레오나르도 공항에서 도심으로 오는 교통편이 매우 혼잡했다는 것 외에 어마한 수준의 인파는 없었다. 우리가 서울 성수동의 끔찍한 인파에 익숙했기 때문일까? 일부 몰려있는 인파도 귀엽게만 보였다. 특히 우리는 Trastevere(트라스테베레) 구역의 호텔에 묵었는데, 이 일대는 젊은 이들이 주로 모이는 동네여서 그런지 관광 인파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에서 '바티칸'을 보지 않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도착한 이듬날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예약한 바티칸 투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20년 전 모월 모일 엄마와 여행객 사이에 끼어 바티칸에 처음 들어섰던 날, 받았던 무수한 문화적 충격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미술 작품과 신을 향한 찬탄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공간. 그 웅장함과 압도적인 기운에 어린 나는 어렴풋이 꿈꾸던 미술의 꿈을 단번에 접었다. 제법 극단적인 결론이었으나, 천 년이 넘는 시간 전에 이런 결과물을 낸 인류에게 나 따위가 좇는 예술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나 싶었다. 또 당시의 나는 무교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그 경이로움에 매료돼 미래의 종교로서 '천주교'를 아주 잠시 꿈꿨다. 당시 구매했던 바티칸에서 만든다는 묵주는 여전히 본가에 있는 엄마 화장대 한편에 고이 모셔져 있다.
다 커서 방문했어도
여전히 바티칸은
제일 짱 멋있다!
너무 후진 표현이지만 '킹, 왕, 짱' 따위의 최상급 표현 없이 바티칸을 묘사할 수는 없다. 제 아무리 유럽의 유명 성당이 이와 비슷한 궤를 흉내냈다 해도 그 모든 곳의 모티브가 된 바티칸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구석 하나하나 디테일을 놓치지 않은 공간, 어떠한 요소도 신을 향한 예찬이 아닌 것이 없다. 귀로 웅웅 들려오는 가이드님의 말을 배경음 삼아 하늘을 보듯 천장에 배치된 그림과 조각품에 시선을 뺏긴다. 홀로 봤다면 지나쳤을 곳곳에 도상이 숨겨져 있다. 웬만해선 과한 감정 표현을 드러내지 않는 신랑도 자꾸만 감탄사를 내뱉으니 자꾸만 내 광대가 올라간다. 내가 언젠가 느꼈던 경이와 감탄의 순간을, 내 반려자가 조금이라도 공유한다는 건 이런 기분인가 보다. 내가 좋아하는 걸 네가 좋아해 주니 더 좋아!
기념품샵에서 엽서를 사서,
바티칸에 하나뿐인 우체국에서 한국으로 편지를 쓰세요.
한 2-3주쯤 걸리니까,
그즈음 일상에 지쳐 매너리즘에 빠져있을 나에게 쓰는 거예요.
여행지에서의 행복을 다시 느낄 수 있어 정말 좋아요.
참으로 로맨틱한 가이드였다. 장장 4시간의 투어를 마치고 녹초가 된 상태였지만 이렇게 로맨틱한 조언을 들은 이상, 놓칠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한 달뒤의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로 한다. 각자 바티칸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이 담긴 엽서를 골랐다. 해가 드리워진 벤치에 앉아 무릎 위 살결에 삐뚤빼뚤 글씨를 차곡차곡 적은 편지를 서로가 볼새라 자꾸만 품으로 순긴다. '1시 40분에 다시 엽니다'라고 쓰인 아주 작은 바티칸의 유일한 우체국에서 한국행 우표를 산다. 십 수년 만에 사보는 우표다. 우리의 엽서를 오동통하게 담은 편지 봉투 위로 우표를 꼼꼼히 붙인다.
바티칸에서 우리의 집으로.
편지가 도착할 2-3주 뒤라면, 나도 본격적으로 이사를 해 우리의 신혼 생활이 제대로 시작될 것이다.
편지까지 잘 보내두고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예의 가이드님이 추천해 준 파스타 맛집을 찾았다. 모든 동양인은 레스토랑 안으로 가 앉는데, 우리는 제법 유로피안스럽게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친절한 직원이 추천해 준 끼안띠 오리지널 레드 와인을 시켰다. 테라스에 늘어지게 앉아 와인을 홀짝인다. 신기하게도 이탈리아에서는 레드 와인은 상온 그대로 서빙이 된다. 미지근한대로 그 매력이 돋보이는 레드 와인을 머금자 이것이 신이 내린 기적의 방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순간에는 느지막이 나오는 메뉴도, 너구리처럼 지나가는 길빵족들도 웃으며 넘길 수 있다.
바티칸까지 보고 나니 벌써 로마에서의 1.5일 차.
지난 이틀간 로마는 우리를 축복하기라도 하듯 따뜻하고 찬란한 얼굴을 내어줬다. 한 시간 한 시간이 귀해서 자꾸만 눈과 코와 귀를 활짝 열게 된다. 로마에서의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가 않다. 한국에서는 한 주도 누리지 못할 찬란한 날씨의 5월의 이탈리아. 고개를 돌릴 때마다 해사한 햇살에 빛나는 샛노랗거나 뽀얀 돌담들에 예쁘다는 말을 낭비한다.
예쁘다는 말 없이 이곳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있을까.
한참 뒤 나온 파스타 두 그릇. 해산물을 좋아하는 그는 페투치니 디 마레(페투치니 면과 해산물)를 시켰고, 나는 카시오 에 페페라는 메뉴를 시켰다. 카시오 에 페페는 파스타 면에 버터와 그라나파다노 치즈, 후추 정도만 들어가는 담백하고 깔끔한 스타일의 파스타다. 이탈리안에게는 한국에서의 '간장밥'쯤 되는 포지션이랄까, 입맛이 없을 때 가볍게 만들어 먹는 파스타 중 하나라고 한다. 심플한 만큼 그 원료들의 맛이 중요한 메뉴라 오히려 이탈리아 밖에서 맛보기 힘든 메뉴라기에 시켜봤다. 다행히도 도전은 성공적. 깔끔한 맛의 파스타가 느끼하게 느껴질 때면 약간의 산도와 드라이한 바디감이 매력적인 끼안띠 한 모금을 곁들이면 그만이었다.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올라오자 골목의 풍경이 다시 한번 눈에 가득 담긴다. 영화나 엽서에서 봤을 법한 한적한 골목, 곳곳에 펼쳐진 야장 테이블, 그 사이를 지나다니는 멋쟁이 옷차람의 사람들. 이곳에선 아직 단 한 번도 인종 차별이랄지, 불쾌한 응대를 경험하지 않았다. 이렇게 꿈같은 나라가 있었나?
사랑스럽고, 찬란하고,
화사하고, 밝으며,
미식으로 빛나는 이곳.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베드로 성당에 방문했다. 아직도 처음 본 순간의 전율을 잊지 못할 피에타 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전 세계 수천 개의 피에타 조각과 그림이 있지만, 바티칸 베드로 성당에 놓인 진품을 따라오진 못할 것 같다. 갈비뼈가 드러날 만큼 메마른 예수가 시체처럼 힘 없이 늘어져있고, 그를 품에 앉은 성모 마리아는 자식을 잃은 공허한 표정으로 베드로 성당의 오른편을 지키고 있다. 이들의 근육 하나하나, 옷자락 하나하나가 대리석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당시에도 한참을 이 앞에서 우둑커니 서있었다. 20년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조각상과 나 사이 거리가 더 멀어졌고 그 사이론 보호 유리막이 생겼다.
이미 배가 부른 상태였지만 오늘만큼은 꼭 콘파냐*를 마시고 싶다. 한국 신혼집 옆에는 아주 훌륭한 에스프레소 바가 있었는데, 여기서 맛본 콘파냐 맛이 너무나 훌륭해서 이탈리아 본토의 맛을 경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에스프레소에 묵직하고 진한 크림을 올린 에스프레소 꼰빤나는 로마에서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다. 부러 커피와 디저트를 전문으로 하는 카페에 들러 'Con Panna'라고 크게 적힌 메뉴를 시키기로 한다.
*Con Panna 꼰빤나/콘판나 : 이탈리아어로 '크림과 함께'라는 뜻이다. 원어 발음 그대로하면 '꼰빤나'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콘파냐'라고 명하는 경우가 많다.
에스프레소에 크림을 올린 메뉴가 아닌, 크림 커피에 크림이 또 올라간 메뉴가 나왔다. 생각한 메뉴는 아니지만 종일 지쳐있던 몸에 당이 쫙 돌게 해주는 메뉴라 먹자마자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이건 허니문 같은 맛이랄까, 비로소 우리의 허니문 콘파냐가 시작됐다.
2025.05.07. ~ 05.19. ROME – NAPOLI – SICILY (TRAPANI - PALERMO)
Siamo in luna di miele.
신랑 래리와의 부부로서의 첫 번째 여정이자, 첫 번째 공동 창작물인 《그와 - 그녀의 허니문 콘파냐》는 신랑 래리와 신부 체리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달리고, 걷고, 맛본 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의 언어로 같은 하루를 기록한 콘파냐처럼 달달한 글로, 결혼과 신혼여행의 뽐뿌가 조금이라도 생기길 바라며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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