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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진짜 결혼한 건가?

EP.02 어서 와 장거리 여행은 처음이지

by 체리


때로 내 신랑은 참 귀엽고, 사랑스럽고, 듬직하고, 멋지고, 존경스럽고, 재밌고, 웃기고, 따스하고, 손이 많이 가고, 아주 가끔 한심했다가도, 기특하고, 화가 났다가도 자꾸만 그의 손을 잡고 싶다.


일 년 동안 온 정신을 다해 준비한 것과 별개로, 결혼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예식 시작 시간 두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과장을 하자면 마지막 행진까지 정말 눈 깜짝할 새였다. 우리는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전쟁기념관 옆에 있는 식장에서 결혼을 했다.


결혼식 2시간 전

필요한 것보다 훨씬 일찍 식장에 도착한 우리는 식장 앞으로 나와 전쟁기념관을 배경으로 수백 장의 사진을 남겼다. 운이 좋게도 합이 척척 맞는 사진작가님과 웨딩 플래너님, 드레스 이모님 등의 도움을 받아 환상적인 경험을 했다.


결혼식 1시간 전

신부는 공주처럼 가만히만 있으라는 주변 만류에 꽃으로 둘러진 의자에 앉아 인형 놀이가 시작된다. 고개를 돌리면 새롭게 보이는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났다. 좁고 깊게 친구를 사귀는 나는 이미 결혼한 친구들이 남편, 때로는 아이까지 품에 앉고 찾아와 줬다. 어느새 달리기까지 하는 아이들이 확연히 달라진 이모의 모습에 쭈뼛대며 인사를 건넸다. 몇 년간 못 만났던 친구들의 얼굴이 불쑥 보일 때면, 이상하게도 찡한 마음이 한가득 올라왔다. 하지만 이 마음을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이어지는 친구들의 행렬에 삐쭉 나오려던 입을 넣고 금세 웃음을 고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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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10분 전

이렇게 한참을 아드레날린 넘치는 인사로 채우다 보면 어느새 신부 대기실에 이상할 만큼 고요한 순간이 찾아온다. 이제 손님으로 가득 찼던 신부대기실에는 내 매무새를 다듬어 줄 이모님과 나뿐이다. 다시 한번 최상의 모습을 위해 드레스를 고쳐 입고 그곳으로 향한다, 그와 내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할 것임을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앞에서 공표할 곳.


결혼식 5분 전

너무 즐거울 것 같은데 난 괜찮을 거 같아! 청심환 안 먹을래!

전날부터 당당하게 말했던 그 신부는 온데간데없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왔다. 웅성거리는 소리도, 신랑 친구분의 사회 소리도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다.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축가의 가사가 갑자기 아득해졌다. 이미 수백 번도 넘게 왼 가사라 잊을 리 없을 줄 알았다. 예도 직원 분께 부탁해 인터넷으로 가사를 검색해 달라 부탁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받아 들어 확인하고 가사를 자꾸만 되뇌며 심호흡을 한다.

입술을 모으고 후 - 처음의 설렘보다. 코로 깊게 훕 - 이 익숙함을 소중해 할 수 있는 것.


결혼식 시작 전에 있었던 일들을 타임라인 별로 촘촘히 정리하라면, 그 속에서 내가 했던 말들도 복기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한데 버진로드에 올라선 순간부터는 한 순간이다. 환희에 찬 박수와 호응에 맞추어 움직이다 보니, 짧은 찰나에 몇 년치의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그 누구의 행사도 아닌 ‘우리만을 위한 첫 행사’.



나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준 건 평생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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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전날 장난처럼 한 말이지만 나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준 건 한평생 처음이다. 모두가 그렁거리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축복과 안녕을 바라주는데, 자꾸만 마음 한편이 간질였다. 정신없는 순간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우리를 바라보던 얼굴 하나하나 - 따뜻하게 움켜쥐었던 손길이 모두 다 세세히 기억난다. 이래서 다들 경조사는 꼭 챙겨야 마음에 남는다고 하는 거구나. 북적이던 연회장이 비워지고 그다음 예식 손님들로 하나둘 채워지는 모습을 뒤로한 채 식장을 나섰다.


식권을 받아가신 손님만 270명 정도. 처음 식장에 입고 왔던 무거운 드레스 대신 가져온 가벼운 원피스를 입고, 여전히 얼굴은 신랑 신부의 모습을 한 채로 함께 차에 올라탄다. 이제 정말 ‘우리’로서의 시작이다. 식만 끝나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왜인지 자꾸만 허탈해졌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모두에게 찾아오는 공허함일까. 다행히도 이 공허함을 곱씹을 새도 없이 친구들이 보내온 축하 인사와 사진에 정신없이 답하다 보면 금세 한밤이 된다. 곱게 된 화장을 씻어내고 공식적인 부부로서 침대에 함께 몸을 뉘었다. 우리는 친구들이 보내준 사진과 영상을 수차례 열어 보며 다시 한번 뭉클해한다. 우리 진짜 예쁘다!


우리 결혼식을 보고 간 이들은 다들 같은 말을 했다.


정말 너희 다운 결혼식,
요즘 애들의 결혼식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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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상공 10,363m, TK093 비행기 안

허니문까지 남은 시간 6시간 20분.


결혼식의 여운을 더 느낄 새 없었다. 우리에겐 먼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우리의 신혼여행지는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첫 목적지는 로마.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엄마 덕에 성인이 되기도 전에 세상 곳곳을 쏘다녔다. 그래서 무려 20년 전쯤 패키지로 아주 잠깐 맛봤던 그 로마다. 서유럽 5개국을 8일 동안 소화하는 엄청난 스케줄의 여행이라 하루에 한 도시 이상을 찍먹 하듯 맛봤다. 그 감칠 난 맛보기 여행에서도 내 기억 속에 가장 선연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


어느 골목을 걸어도 4000년 전 과거 한순간을 걷는 것처럼 보존이 잘 된 돌길, 종일 찬란했던 햇살, 여행에 앞서 급하게 본 <로마의 휴일> 속 촬영지가 도시 곳곳에서 선명한 컬러 버전으로 펼쳐졌다. 참 이상하게도 그렇게 많은 유적지와 랜드마크 중 내 기억 속에 남는 건, 바티칸 뒤쪽으로 펼쳐진 동네 골목이다. 로마의 화사한 햇살을 잔뜩 맞고 서있던 과일 좌판, 동화에서나 봤을 법한 금발과 백발 중간 어디쯤의 머리를 한 아주머니가 배도 채 가려지지 않는 앙증맞은 하얀 레이스 앞치마를 하고선 몇몇 과일을 팔고 있었다. 작지만 예쁜 색상으로 익은 복숭아, 백설공주 만화에서 나올 것 같은 외형의 사과, 검붉다고 표현해야 할 만큼 잘 익은 체리 등을 팔고 있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통조림 체리 외에는 볼 수 없던 시절인지라 (맙소사 내가 이렇게 나이가 먹었다니), 엄마와 참 신기해하며 체리를 구매했다.


담아준 통에 생수를 들이붓고 대충 씻어 그 돌길 위에서 엄마와 붉은 체리를 달게 나눠 먹었던 기억이 강렬하다. 처음 맛봤던 아찔하게 단 맛, 후르츠 칵테일에 든 체리 따위랑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과일이었다.

tmi.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15년 뒤, 나는 체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튼 그 어린 나이에도 언젠가 로마는 다시 한번 방문해야지, 한 달 살기를 하러 와서 골목 구석구석을 꼼꼼히 다 담아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졌다. 그렇게 20년 묵혀둔 꿈을 가지고 내 동반자와 이탈리아를 찾는다. 막상 로마에선 3박 4일을 머무르는 여정이다. 은근 겁쟁이인 신랑은 아시아 나라들만 여행해 보았는데, 그 마저도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방문한 나라는 일본뿐이었고 그 외에는 회사 워크숍 따위의 목적으로 방문한 동남아 휴양지가 다였다. 그래서 무조건 그에게 서양 어딘가를 경험시켜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게 됐다. 그때 단번에 떠올랐던 나라가 이탈리아다.


신혼여행이니 직항 편을 타도 될 텐데 겨우 몇 십만 원에 젊음을 팔아 경유 항공권을 끊었다. 터키에 머무르는 2시간을 포함하면 무려 16시간 정도의 여정. 장시간 비행은 정말 오랜만이다. 아직 6시간 정도밖에 비행하지 않았는데 온몸이 퉁퉁 부어오르는 느낌에 비즈니스 좌석을 끊어볼 걸 그랬나, 아주 잠시 후회했다. 창가 좌석을 고집한 덕에 화장실도 편히 가지 못한 상태로 옴짝달싹 못한 채 시간을 보낸다. 온 세계 인구가 비만해지고 있다는데 비행 좌석은 왜 여전히 과거 기준에 머무르는 걸까… 나보다 큰 신랑은 얼마나 불편할까, 세상모르고 곤히 잠든 신랑을 살폈다.


창가 좌석을 선택한 우리 커플 바로 옆에는 뉴욕에서 쇼콜라티에를 하고 있다는 Sandra가 앉았다. 그녀는 온 세계 나라를 몇 개월씩 여행하듯 산다고 했다. 그녀가 로마에서도 오랜 시간 머물렀다기에, 로마 곳곳의 장소를 찍어뒀다. 그녀는 제법 수다쟁이였는데 로마 장소 추천과 그곳에 얽힌 본인의 썸 스토리, 또 다른 나라에서의 러브스토리 등을 정신없이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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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이때다 싶어 우리도 우리의 러브스토리도 자랑해 본다. 전날 있던 우리의 결혼식 사진을 꺼내 들자 Amazing! Lovely! Perfect! 따위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신랑은 최근 몇 개월간 이 여행을 준비한다며 앱으로 영어 공부를 해온 참이었는데, 그에게 조금 더 말을 해보라며 그에게 자꾸 화두를 던졌다. 더듬더듬 단어를 엮어 말을 이으려는 그 모습이 귀엽다. 신랑의 지인들도, 가족들도 미처 알지 못할 귀여움일 것이다. 나는 그에게 참으로 다양한 감정과 사랑의 진폭을 느낀다.


때로 내 신랑은 참 귀엽고, 사랑스럽고, 듬직하고, 멋지고, 존경스럽고, 재밌고, 웃기고, 따스하고, 손이 많이 가고, 아주 가끔 한심했다가도, 기특하고, 화가 났다가도 자꾸만 그의 손을 잡고 싶다. 지금까지도 스스로가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건만 부부로서 연을 약속한 이후부터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보다 다채롭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일이었나. 불편해 보이는 자세를 고쳐 잡아주니 그가 떠지지 않는 눈을 꿈벅인다.

왜, 뭐 줄까?

눈 뜨자마자 내 안녕을 살펴주는 말이 나와 새삼 놀란다. 그는 결혼을 한 주 남긴 시점부터는 그전보다 더 따스해졌다.

아니, 좋아서! 우리 진짜 결혼한 건가?

내 말에 신랑은 헤실헤실 웃으며 다시 눈을 감는다. 우리는 장장 16시간의 여정 동안 제법 훌륭한 터키항공 기내식을 찬양했고, 서로 어떤 메뉴가 맛있는지 추천했고, 때로 옆에 앉은 뉴요커 산드라의 끊이지 않는 말에 호응하며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왜인지 이 여행이 우리 삶의 대단한 인트로가 될 것 같다는 예감.



신랑, 준비 됐지?



2025.05.07. ~ 05.19. ROME – NAPOLI – SICILY (TRAPANI - PALERMO)
Siamo in luna di miele.
신랑 래리와의 부부로서의 첫 번째 여정이자, 첫 번째 공동 창작물인 《그와 - 그녀의 허니문 콘파냐》는 신랑 래리와 신부 체리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달리고, 걷고, 맛본 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의 언어로 같은 하루를 기록한 콘파냐처럼 달달한 글로, 결혼과 신혼여행의 뽐뿌가 조금이라도 생기길 바라며 글을 썼습니다.

신랑의 글 ⇢ https://brunch.co.kr/brunchbook/honeyconpann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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