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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결혼식 D-1

EP.01 래리와 체리의 러브스토리, 프롤로그

by 체리
오래오래 행복할 우리의 첫 페이지. 우리의 허니문 콘파냐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느새 결혼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체리 유부녀 되기 D-1. 아니, 벌써 열두 시가 지났으니 결혼식 당일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참으로 다이나믹한 장래희망 변천사를 가졌다. 어릴 적 꿈은 대부분 예쁜 옷을 입은 직업의 총집합이었다. 풍성한 치마를 입고 빼쪽 구두를 신고 빨간 루주를 바른 사람들이면 그저 선망했었던 어린 시절의 나. 그러니 모든 여성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 결혼, 그리고 결혼식은 항상 빠르게 닿고 싶은 꿈이었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기에, 결혼이 쉬운 건 줄만 알았던 어릴 적을 지나 20대가 되어보니 연애라는 게 결혼이라는 게 마냥 쉬운 게 아니었다. 제법 다양한 연애도 했다. 상대방이 좋은 놈 이건, 나쁜 놈 이건 일단 끝을 결혼으로 상정하고 시작했던 수많은 연애들. 한쪽이 이렇게 애타게 원함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장에 발을 내딛는 결론은 모든 연애의 엔딩은 아니었다. 꿈이 결혼이긴 했지만 아무나랑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을 하지 못한 채 서른이 됐다.


당장이라도 결혼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데 누가 영 좋아지지 않아서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싶었다. 마음이 조급했던 스물아홉부터 서른둘까지 약 3년 정도의 기간 동안 나는 과장 없이 40여 번의 만남(소개팅)을 적극적으로 해댔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상대방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생기거나 좋은 조건을 가지면 자격지심 탓인지 이성으로서 마음이 영 생기지 않았고, 그 와중에 상대방이 내가 좋다고 하면 저 사람은 나에게 바라는 게 뭐길래-하는 심통 난 마음이 들었다. 반면 상대방이 내 스타일이 아니거나 조건이 별로라거나 뭐라도 걸리는 구석이 있는 날엔 공들여 시간을 내고 꾸미고 나온 것 자체가 허탈하고 슬퍼졌다. 이런 무작위의 만남에서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는다는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나에게는 영 일어나지 못한 일이니 2.5% 이하의 확률로 성사되는 일이랄까.


아무튼 그런 시간을 거쳐 "이젠 정말 혼자 살아야겠다" 다짐했던 시기가 있었다. 아무래도 나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는 듯 하니 연애를 하려는 노력 따위는 그만두고, 나 혼자 잘 오랫동안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일에 대해 조금 더 파고들기 시작했다. 혼자 고민하는 일을 넘어 세상을 확장하기 위해 업무 관련 모임과 스터디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지금의 남편 성환을 만났다.


처음 만난 그의 조건은 내가 원하던 이상형의 조건에 하나도 부합하지 않았다. 연상을 노래하던 나에게 한 살 어린 그는 까마득하게 어린 아이 같았고, 날카롭고 남자답게 생긴 얼굴을 선호했던 나에게 뽀얗고 순하게 생긴 그는 더더욱 동생만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이성으로서의 경계심 하나 없이 편하게 행동했다. 그 덕에 경계심이 많은 우리 둘은 빠른 시일 내에 제법 친한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일적인 이야기가 오가던 우리 사이엔 조금씩 사적인 영역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들이 갸웃 거리며 남자와 여자 단둘이 그런 걸 한다고? 싶은 일들이 점점 늘어났고 결국 우리는 공식적인 연인이 되었다. 나와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른 일을 하는 그와 있을 때면 내 세상은 확장되고 더 깊어졌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네 삶을 살다 보면
네 짝이 언제든 나타날 거야


많은 이들이 종종 이런 말을 던지면 화가 났다. 내가 내 삶을 열심히 살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내가 연애에 그렇게 목매어 살았던 적이 있던가,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정말 내 삶에 집중해 살던 시기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만나지는 상대방이 생기자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그렇게 그리던 짝이 참 자연스럽게도 내 앞에 나타났다.




여기까지가 나의 결혼식과 우리 러브스토리의 프롤로그.

우리는 우연과 운명이 촘촘히 얽힌 시간 숲을 지나 오늘날, 결혼식을 앞 둔 사이가 됐다. 지나올 땐 숲에 놓인 나무 하나하나가 얼마나 특별한 줄 몰랐다. 돌아보니 우리의 지금을 만든 순간 하나하나가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 기적이었는지 문득 깨닫는다. 당장 몇 시간 뒤면 막연하게 꿈꾸던 버진로드를 걷는다. 심장이 두근거려 부러 두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해 본다.


사실 요 며칠 자꾸만 심장이 두근대고 마음이 일렁였다. 그 모든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결혼식에서 우리는 혼인서약서와 축사를 대신해 우리를 축하해 주러 온 하객들에게 진심을 담은 편지를 전했다.

아래는 그 편지의 일부.


안녕하세요, 하객 여러분. 오늘의 신부 채원입니다.
참 오랫동안 막연하게 꿈꾸던 결혼이라는 큰 일을 드디어 오늘에서야 할 수 있게 되어 참 기쁩니다.

저와 신랑 성환이는 사근사근 하지만 제법 까다롭습니다.
그러니 오늘 여기 모신 분들은 모두 하나하나 저희가 참으로 애정하는 귀한 분들 일 거예요.
그래서인지 정말 몇 날 며칠을 얼마나 설레고 뭉클한 밤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저는 30대가 되고부터는 삶이 참 버겁다 생각했어요.
아무도 등 떠민 적 없는데, 세상과 맞선다는 생각으로 참 악착같이 살았거든요.
이 악물고 살던 제가 신랑 성환이를 만나고 참 많이 변했습니다.
제자리에서 묵묵하고 꾸준하게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성환이를 보며,
또 그렇게 은근하고 묵직한 사랑을 저에게 끊임없이 주는 모습을 보며
온화한 성실함이라는 것도 가능하구나, 깨닫게 되었어요.

저는 어느 순간부터 성환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주말을 기다리게 됐어요.
그 수많은 날 중 언젠가 '아, 이 사람이랑 결혼하면, 특별하지 않았을 일상도 특별해지겠다.
나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어요. 그 작은 마음 하나로 시작된 다짐은
오늘 이 결혼식 날까지 점점 커졌고, 어느새 확신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아, 오늘이 되기까지 나보다 나의 연애를 더 응원해 줘서 정말 고마워.
내가 언젠가 너희들에게 부부싸움을 했다고 신랑이 너무 밉다고 하거든
결혼식날의 너는 성환이를 너무나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정신 차리라고 전해줘!

사랑하는 우리 엄마, 나 엄마만큼이나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난 것 같아.
평생 담뿍 사랑받고, 사랑하고 살게 - 사위도 자주 보여 줄 테니까 나 잃는다고 생각하지 마.

오늘 걸음 해주신 모든 하객 여러분, 이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연휴에 부러 시간을 내서,
아끼던 옷을 고심해 고르고 이곳까지 걸음 해주셨을 정성 정말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축하해 주신 이 마음 절대 잊지 않고 정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신부 채원 올림.


그러니까 오늘 이 순간의 기록은 오래오래 행복할 우리의 첫 페이지. 우리의 허니문 콘파냐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2025.05.07. ~ 05.19. ROME – NAPOLI – SICILY (TRAPANI - PALERMO)
Siamo in luna di miele.
신랑 래리와의 부부로서의 첫 번째 여정이자, 첫 번째 공동 창작물인 《그와 - 그녀의 허니문 콘파냐》는 신랑 래리와 신부 체리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달리고, 걷고, 맛본 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의 언어로 같은 하루를 기록한 콘파냐처럼 달달한 글로, 결혼과 신혼여행의 뽐뿌가 조금이라도 생기길 바라며 글을 썼습니다.

신랑의 글 ⇢ https://brunch.co.kr/brunchbook/honeyconpann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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