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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n-tic 너와 나의 언어

EP.04 테베레 강을 함께 달리다

by 체리
찬란한 날씨에 해외에서 달리고 있다는 해방감이 나를 들뜨게 했다. 1키로만 뛰어보자던 약속이 이어져 2키로, 3키로로 늘어난다.


우리 부부는 어떤 부분에서는 참 닮았다.

1.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사람들을 만나는데 적절한 선과 텀이 필요하다.
2. '오늘은 쉴 거야!'라고 다짐한 날에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한다.
3. 여행은 다양한 것을 눈으로 보는 것, 여행지의 구석구석 구경하는 것이 좋다.
4. 헬스든 달리기든 어떤 종류의 운동이든 꼭 해야 성이 풀린다.
5. 커피 없인 못 산다. 하루 한 잔은 꼭 맛있는 커피를 마셔야 한다.

이탈리아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티켓만 끊은 날부터, 우리는 '로마 도심을 달리고 마무리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목표를 세웠다. 신혼여행에 가지고 있던 몇 안 되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셈이다.


달리기 모임에 운영진을 도맡고 있을 정도로 제법 오래 달려온 신랑 래리는 달리기를 사랑했다.

달리고 마시는 맥주가 얼마나 맛있게요.

그의 회사 명함에는 각자가 좋아하는 멘트를 기재하게 되어 있는데, 한참을 그의 메시지가 된 것이 위의 말이었다. 작년부터 연 2번쯤 하프 마라톤도 완주했다. 2년 반을 곁에서 달리기가 좋다는 말을 들었으니 처음엔 마지못해 뛰기 시작했던 나도 달리기에 매력을 차차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해외에서 부부가 함께 뛰는 그림이라니, 너무 멋있을 것 같아 평생을 폼생폼사로 사는 나는 덜컥 뛰겠다고 공표하고 가장 예쁜 운동복을 두벌 골라 캐리어에 넣었다.


로마에 도착한 지 3일 차 아침.

시차 적응, 바티칸 투어 일정 등의 핑계를 해치우고 드디어 달릴 수 있게 됐다. 7:30, 이른 시간부터 아침을 시작한 로마 사람들의 속삭이는 소리가 창 너머로 들려온다. 설레는 표정으로 각자의 운동복을 입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수많은 일화의 배경이 된 로마의 가장 큰 강, 테베레를 달리기로 했다. 테베레는 로마 중심부를 관통해 구불구불 지나는 강이다. 서울의 한강만큼 넓지는 않지만 로마 여행을 하다 보면 하루에 한두 번은 꼭 마주하게 되는 강이다. 숙소를 지날 때마다 '이 강을 뛰어보자' 했던 것이 드디어 오늘에서야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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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종종 함께 달리곤 했지만 이럴 때마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는 너무나 잘 뛰는 고수이며 나는 1키로도 채 단숨에 달리지 못하는 하수라는 것. 애초에 함께 끝까지 달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없기에 우리는 1키로만이라도 함께 발맞추어 달려 보자고 입을 맞춘다. 달리기 시작하니 발이 가볍다. 오랜만에 운동이기도 하고, 찬란한 날씨에 해외에서 달리고 있다는 해방감이 나를 들뜨게 했다. 1키로만 뛰어보자던 약속이 이어져 2키로, 3키로로 늘어난다.


날아갈 것처럼 몸이 가볍다. 이런 들뜬 마음과는 별개로 여전히 나는 느리다.

시계에 떠오르는 나의 페이스는 7분 후반대에서 8분 정도, 보통 5분대로 달리는 그에겐 한참이나 답답할 속도다. 그는 내 바로 앞에서 뒤돌아 뛸 만큼 여유롭게 달린다. 나에게는 이미 몇 번이나 걷고 싶다는 욕망이 올라왔지만 오랜만에 한껏 행복한 그의 표정을 헤치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숨을 고쳐 잡고 뛴다.



자기! 먼저 가고 싶으면
달려가도 돼!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에 이 짧은 대사를 몇 번이나 끊어가며 외친다. 사실 그를 잡고 함께 걷고 싶었으나 그가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리라는 진심을 숨긴 배려를 한다. 이런 말뿐인 내 배려에 그는 어김없이 함께 뛰자며 응원의 말을 건넨다.


- 반 왔다!
- 200m만 더 가면 1키로야!
- 쉬면 안 돼. 천천히라도 뛰자.

그의 응원을 채찍 삼아 마침내 2km를 달렸다. 나에게는 20km와 같은 시간이다. 뛰었다는 표현도 부끄럽게 나의 워치엔 1km에 8'06"란 기록이 반짝인다. 약속한 2km가 되자마자 그는 나 이제 뛰다 올게, 하며 본래 본인의 페이스로 앞질러 뛰기 시작한다. 잠시 숨을 고르며 걷는 사이 그는 그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멀리까지 내달렸다.


IMG_8562.HEIC 얼마나 더 자유롭게 달리고 싶었을까!


그와의 연애는 항상 이랬다. 남에게 폐 끼치는 게 죽기보다 싫어 늘 배려를 연기해 온 나, 진심으로 나를 배려해 주는 그.


그의 배려가 항상
나의 연기를 이겼다


나는 그가 나의 고집과 연기된 배려를 이겨줘서 좋다. 평생을 나를 이겨줬으면 좋겠다. 우리는 언젠가 각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랑의 언어*에 대해 꼽아본 적이 있다.

*게리 채프먼이 쓴 책 제목으로, 모든 사람에게는 [1. 인정의 말 / 2. 함께하는 시간 / 3. 선물 / 4. 봉사 / 5. 스킨십] 중 사랑의 표현 방식으로서 우선순위가 다르게 작용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선물과 헌신.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함께하는 시간과 인정의 말.

나에게 있어 사랑은 눈으로 보이는 것, 희생하는 것이었다. 내가 원했던 사랑의 선물은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무언가보다는 내가 미처 배려할 새도 없이 무작정 내 손에 쥐어주는 예상치 못한 호의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나에게 거절할 새 없이 쥐어주는 이런 종류의 배려와 사랑은 나에게 최고의 사랑 방식이다. 반면 그에게는 온전히 함께하는 시간과 인정의 말이 중요했는데, 부족해도 그의 곁에서 함께 뛰어보려 노력하는 것이 나만의 보답이었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는 여유롭게 걷기 시작한다. 막상 혼자 걸어보니 로마 강이라고 딱히 특별하진 않다. 테베레의 강소리도, 새소리도 한강의 그것과 제법 비슷하다. 특히 공덕에서 합정으로 넘어가는 한강공원의 길목과 제법 비슷하다. 어쩌면 날 들뜨게 했던 건 나의 짝꿍과 로마에서 함께한다는 생생한 감각 아니었을까. 그 감정이 이 경험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그의 발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그의 얼굴과 목덜미엔 땀이 흥건하다. 어느 때보다 개운한 표정으로 그가 싱긋 웃는다.


그는 7km의 거리를 평균 6'10"의 속도로 달렸다. 나는 겨우 2km의 거리를 평균 8'03"의 속도로 걸었다(?) 그러니까 나를 배려한 첫 2km를 제외한다면 그는 5분 초반대로 5km를 달리고 온 것이리라. 이것이 우리가 하는 최대치의 사랑의 방식이었다.


우리 조금 멋지다!


아직 호텔로 돌아가려면 2km 정도는 더 걸어야 한다. 우리는 터덜터덜 걸으며 우리의 멋짐에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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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코스는 카페에서 글쓰기. 여행에서의 생생한 기록을 주에 2회는 남겨보기로 약속했으니 오늘은 호텔 주변 카페에 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로마 어디에서 커피를 시켜도 실패 없는 맛이다. 하루 한 번씩 꼭 맛있는 커피를 마셔야만 하는 우리는 아드레날린과 카페인에 취해 글을 써 내려간다. 제법 넉넉하게 여정을 계획했다고 생각했는데 찬란한 로마에서의 하루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로맨틱이란 단어가 Roman(로마사람들의) 같은 이라는 뜻에서 왔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이 꿀 같은 기간이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



2025.05.07. ~ 05.19. ROME – NAPOLI – SICILY (TRAPANI - PALERMO)
Siamo in luna di miele.
신랑 래리와의 부부로서의 첫 번째 여정이자, 첫 번째 공동 창작물인 《그와 - 그녀의 허니문 콘파냐》는 신랑 래리와 신부 체리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달리고, 걷고, 맛본 경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의 언어로 같은 하루를 기록한 콘파냐처럼 달달한 글로, 결혼과 신혼여행의 뽐뿌가 조금이라도 생기길 바라며 글을 썼습니다.

신랑의 글 ⇢ https://brunch.co.kr/brunchbook/honeyconpann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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