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도시, 그리고 가시
뜨개 초보의 고군분투 뜨개 일상
작가소개.
리틀포레스트 같은 삶을 사는 게 소망이었고, 최화정씨 같은 명랑어른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그것들에 한 발짝씩 가까워지는 중. 매일 달라지는 계절에 맞춘 작은 미(美)식을 즐기고, 조금씩 나아가는 뜨개에 그 뜻을 두며 살고 있다.
벌써 세 번째 뜨개. 한 수업에 한 개의 작품씩 완성해 세 번째 작품에 들어갈 차례였다. 얼마 전 뜨던 모자까지 마무리하고 원형 뜨기에도 자신이 붙었겠다, 다가오는 추석 명절 연휴를 떠올리며 할머니에게 딱 맞는 모자를 떠서 선물하기로 간 큰 다짐을 했다.
나는 충청도 작은 도시 청주, 거기서도 봉명동이란 외진 동네서 자랐다. 낮에는 늘 한약 냄새와 양약 냄새가 뒤섞여 진동하는 가게 골방에서 지냈고, 여기서 외할머니가 만들어준 밥심으로 쑥쑥 자랐다. 외가며 친가며 모두 키가 작은 유전자만 물려줬는데도 나 혼자 평균 신장을 훌쩍 넘도록 자란 건 그녀의 밥 덕분이었다고 깊이 믿는다.
그래서 어릴 적 기억 대부분은 다소 칙칙한 조명의 골방에서 외할머니와 놀고, 그녀가 차려준 콩자반과 밥을 먹고, 그 작은 방에서 병아리까지 키웠던 이미지 조각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나는 종일 바쁜 엄마의 그림자 아래서 모성애 대신 할모성애를 양분으로 자랐다. 그녀는 늘 그 연령대에 비해서 기운도 좋고 총명했기에 그녀의 막둥이인 우리 엄마와 그 딸인 나는 그녀의 참 많은 것을 누렸다. 어느덧 나와 내 동생이 중학교에 들어가 청주에서 학군이 좋다는 동네로 이사하게 되었을 때, 할머니에겐 비로소 자유가 생겼다. 평생을 다양한 일거리들로 바삐 살던 그녀는 그 시간을 자유가 아닌 무료로 느꼈다. 그녀는 무료를 달래려 노인정에 나가고, 시에서 운영하는 노인센터에 나가고, 이듬해에는 노인대학까지 들어갔다. 가끔 그녀를 만나는 날이면 그녀는 신나는 표정으로 센터에서 배운 문자 보내는 실력을 뽐냈고, 그다음 방문에는 학교에서 배운 일본어를 보여줬고, 종종 알파벳 읽는 법을 묻기도 했다.
그 세대 할머니들이 쉽게 도전하기 어려운 일들을 쑥쑥 해내는 그녀니까, 또 나는 내 삶에 너무나 많은 과제에 치여 바쁘니까, 그 이후론 서울로 이사를 와버려서, 다양한 핑계를 이유로 점점 그녀와의 추억이 희미해졌다.
팬데믹 시기의 기나긴 격리 시절을 겪으며 그녀의 빛나던 총기가 차츰 사라졌다. 무시무시한 바이러스의 전염을 우려해 우리 가족을 비롯한 자식들의 방문이 줄었다. 그녀가 매일을 들락거리던 노인정도 타 도시에서 유사 전염 사건이 나오기 무섭게 폐쇄됐다. 그녀가 늘 목 빠지게 기다리던 일 년에 겨우 두 번 있는 명절도 더 이상 모이지 않게 됐다. 그 위험성을 제대로 헤아리지도 못한 질병으로 인해 할머니는 그 시기에 아주 자주 자녀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언제 오니?
모두가 바이러스의 위험만 말했다.
그 사이 그녀에게는 흔한 코로나 대신 고독으로 인한 우울 내지 정신적 문제가 찾아왔다. 고독이 이렇게나 무서운 바이러스인 줄 우리는 미처 몰랐다. 팬데믹의 공포가 무뎌질 때쯤 다시 그녀의 딸들, 그러니까 나의 이모들이 그녀를 다시 자주 찾기 시작했다. 하나둘 그녀의 섬망 증상을 느꼈다. 섬망보다 무서운 건 또렷하게 빛나던 그녀의 눈이 한층 무뎌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치매 3등급(일상생활에서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을 진단받았다.
놀랍게도 치매 3등급을 진단받은 자들은 그 많은 치매 인구 중 그나마 정상적인 노인들로 취급되기에 중증 요양원에 갈 수 없다. 청주시에선 대신 매일 출퇴근 하는 형태의 센터를 지원했다. 그런 종류의 센터는 우리가 유년 시절에 했을 법한 크레파스를 이용한 그림 그리기, 떡고물 묻혀 인절미 만들기 등의 일들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아침에 눈을 뜨면 ‘할머니, 9시까지 OO 앞으로 나오세요!’ 하고 커다랗게 쓴 종이를 보고 90년 넘는 세월동안 그래온 것처럼 옷을 차려 입고, 동선에 맞추어 쓰인 안내문을 따라 나가 그녀를 태우러 온 센터 봉고차에 올랐다. 그렇게 낮에는 시 요양센터에 다녀왔다가, 저녁이면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된다. 주말에는 세 명의 딸이 돌아가며 그녀 곁을 지켰다. 외할머니의 사랑을 가장 늦게까지 누린 우리 엄마는 더 자주 그녀의 집을 찾았다. 종일 대화도 제대로 없다가 떠나려고 일어서는 낌새만 보이면 자꾸만 ‘어딜 가냐’며 서운해하시는 할머니 곁을 지켰다.
덕분에 나는 내심 피하고 싶은 할머니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이런 그녀의 상태는 내 마음속에 커다란 가시였다. 자꾸만 욱신대고 신경 쓰이는데, 막상 만지면 아플 것 같아 눈을 돌려 못 본 척하고 싶은 깊고 깊게도 박힌 가시. 고향에 겨우 두세 달에 한 번 찾는 나는, 분기 행사처럼 아주 문득문득 그녀를 찾았다. 매 방문마다 그녀의 눈빛은 자꾸만 무뎌졌다. 짙은 갈색으로 빛나던 할머니의 눈은 희끄무레한 진회색으로 변했다. 내가 알던 그녀의 모습 역시 희미해졌다.
치매를 겪으면 모든 부분이 점점 무뎌진다, 감정도, 생각도. 심지어는 최소한으로 자신을 챙기던 일들도 잊는다. 예를 들자면, 밥을 먹었단 사실과 씻어야 한다는 사실이나 방법까지 잊는다. 그래서 주변인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들을 챙겨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그녀를 위해 모자를 뜨기로 다짐한 건 아주 알량한 양심, 가시는 차마 제대로 건들지도 못할 거면서 그걸 제대로 빼내지도 못하고 두텁게 덮어 버리겠다는 아주 우스운 위선이었다.
내 모자를 만드는 데 사용했던 실보다 훨씬 좋은 실을 구매했다. 진득한 보르도 레드 색깔의 실은 울 100%라 도톰하고 톡톡한데, 살에 닿는 촉감은 남다르게 고왔다. 어떠한 북서풍도 막아줄 그런 모자가 되길 바라 한 땀 한 땀 기도하며 떴다. 술술 잘 떠나가다 바늘에 코가 턱 걸릴 때마다 울컥해서 몇 번을 마음을 다잡았다. 혹시나 사이즈가 맞지 않을까 마무리 부분만 남겨둔 채로 청주를 찾았다. 엄마는 내가 뜨개를 시작했다는 것이 기특하고 이상하다고 했다. 과년한 딸이 뜨개질을 시작했다는 게 뭐 그리 기특하고 이상한 걸까. 온갖 명절 특선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는 TV 건너편 소파에 기대어 앉아 바늘을 놀리고 있으면 엄마는 유난스럽게 시끄러운 TV 대신 조용한 나를 한참을 바라봤다.
할머니에게 잘 맞을까?
(도리도리)
챙이 넙데데하게 펼쳐지는 모양새라 마치 젊은이들의 모자 같다고, 할머니가 쓰면 되레 볼품없어 보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입을 뻬쭉 내밀고 할머니 댁으로 가서 씌워보고 마무리 하기로 한다. 그렇지만 역시 딸은 딸이다. 엄마가 말한 대로 할머니에게 넙데데하고 큼지막한 모자를 씌우자, 무언가 잘못돼 보였다. 전체 분량에서 반 이상을 풀러 내야 해서 잠시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내 어릴 적 별명을 연거푸 부르며 밥을 먹었는지 묻는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열 번이고 다시 떠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열 번은 조금 힘들지도…
할머니는 소파에 앉아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를 듣다, 또 뜨개를 하는 나를 한참 바라보며 ‘뭐 뜨니?’하고 오바를 조금 보태자면 열 번 물었다.
응, 할무니 모자!
부러 아기 같은 목소리로 크게 꽥꽥 소리쳤다. 9n살의 그녀에게 3n살의 나는 60살이나 어린 아기일 뿐이니까, 이건 나의 의무이며 권리다. 할머니가 평소와 달리 무언가에 자꾸만 관심을 주니까, 뜨개와 나에게 관심을 보이니까 엄마는 옆에 앉아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해 줬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 생계 전선에 있던 때에 뜨개 공장에 다녔단다. 우리 엄마도 아주 오래전 뜨개를 취미로 배워 아주 어린 나의 옷이며, 모자를 만들어 준 기억이 있었으나 그게 할머니까지 올라갈 집안 내력인지는 몰랐다.
아니, 그럼 벌써 3대째 뜨개질을 하고 있는 거네?
내가 뜨개 금수저라니!
뭐라도 금수저라 참 다행이다. 아무튼 나는 뜨개로 생계까지 한 달인 앞에서 겨우 2~3주 배운 실력으로 바늘을 놀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내가 누군지 무얼 뜨는지 물었고, 또 밥을 먹었는지 물었다. 엄마는 어느 틈엔가 내 옆에 앉아 코바늘을 이어받아 모자를 다시 풀고 뜨고 손을 더했다.
오랜만인데, 네가 하는 거 보니까 하고 싶네!
마실처럼 뜨개를 시작한 엄마는, 일전에 내가 뜬 구역까지 푸르고 뜨고를 반복해 할머니에게 딱 맞는 모자를 만들어냈다. 나와 엄마의 소중한 노동을 최소 30시간 이상 들인, 귀하디 귀한 모자가 완성됐다. 컬러도 크기도 모두 박갑순 여사만을 위해 맞춰진 100% 고객 맞춤 모자. 모자를 쓰고 그녀는 이게 뭔지 모르겠다는 듯한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모자를 쓰는 내 그녀는 계속 웃었다. 그러면서도 ‘너나 써!’하고 양보인지, 미루기인지 모를 말을 건네는 모습에 모두가 온 바탕 웃음이 터졌다. 이 역할을 한 것만으로 나의 명절 선물 작전은 대성공!
나는 다시 여러 핑계를 들며 고향에 여전히 자주 가지 않을 테지만 이번 겨울 동안 따스하고 묵직한 모자가 그녀의 머리를 감싸안고 있을 거라 다행이다.
혹여 이 모자가 누구의 것인지, 누가 준 것인지, 심지어는 쓰는 사실마저 잊어도 좋아.
그냥 춥지도, 덥지도 아프지만 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