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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Sep 27. 2024

푸를 수 없는 숙제

코바늘 하다 마주한 인생 숙제

뜨개 초보의 고군분투 뜨개 일상

작가소개.
리틀포레스트 같은 삶을 사는 게 소망이었고, 최화정씨 같은 명랑어른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그것들에 한 발짝씩 가까워지는 중. 매일 달라지는 계절에 맞춘 작은 미(美)식을 즐기고, 조금씩 나아가는 뜨개에 그 뜻을 두며 살고 있다.


두 번째 뜨개 수업은 시작부터 산뜻했다. 겨우 한 주 만에 한층 높아진 하늘과 그 아래로 화창하게 개인 연희동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전과 다른 장소 같았다. 연희동 인근 정류소에 내려 공방까지 가는 길, 지난주엔 미처 보지 못한 올망졸망 숍들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더 귀여워, 예감이 좋았다.


지난주 불철주야 홀로 완성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첫 수업 만에 한 작품을 다 떴다는 자신감까지 마지막 엣지로 장착한 채 당당하게 걸어줬다. 공방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수업에 앞서 다음 작품을 골라야 했다. 


뜨개 인생 두 번째 작품은 무엇으로 해야 할까


아직 누군가에게 건넬 수준의 실력은 아니라는 철저한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었다. 남이 아닌, 내가 활용할 법한 무언가를 또 고르자니 머리가 아팠다. 8월 끝자락인데도 도통 시원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뜨개하면 단번에 떠오르는 목도리, 가디건 따위의 소품들이 눈에 차지 않았던 탓이다. 맥시멀리스트지만 역설적으로 지독한 실용주의자인 나는 어쩌면 그다음 주부터 쓸 수도 있을지 모를 모자로 목적지를 정했다. (물론 실제로는 이보다도 훨씬 이후에나 추워졌다.)


뜨개로 구현할 수 있는 모자는 상상 이상으로 다양했다. 모티브*가 다양한 색깔로 배치되어 마치 꽃이 피어나는 듯한 디자인의 모자부터 심플하게 죽 떠내려가 단정해 보이는 모자까지, 하나씩 경건하게 벗고 쓰고를 반복한다. 내가 원하는 색감의 실로 만든 모습을 상상해 본다.

*모티브: 코바늘로 떴을 때 실 짜임과 빈칸의 조합이 꽃 문양처럼 퍼져나가는 형태를 모티브라고 한다.


이렇게 소라게가 되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아잇, 역시 잘 모르겠을 땐 심플한 게 최고다


모자의 형태를 골랐으니 이제 실을 고를 차례였다. (산 넘어 산이다.) 곧 날이 추워질 테고 그렇게 날이 서게 추운 날엔 뽀송함이 필요하다. 실 사이사이 공기를 머금어 아주 뽀송해 보이는 털실로 선택지를 추렸다. 돌돌 말려 동그랗게 정리된 털실은 어떤 색깔이든 예뻐 보였다. 하얀색은 눈송이 같아서, 연회색은 포근해 보여서, 또 검정은 시크해 보여서 그 나름의 이유로 귀여울 것 같았다. 몇 번을 털실을 오가며 들다 결국 연분홍 색상의 실볼을 집어 들었다. 뽀송함을 극대화 해줄 수 있는 연분홍색 보드라운 실을 손에 움켜쥐고, 이미 한결 뽀송해진 마음으로 매장 위층에 위치한 강의실로 들어섰다.


강의실의 가장 첫 번째 책상, 선생님 바로 앞자리에 찰싹 붙어 앉은 친구 유진이 그사이 가방을 떠 매고 온 나를 보자마자 참 너답다며 진저리쳤다. 뜨개로 뜬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메고 그에 걸맞는 컬러감의 원피스까지 차려입고 나선 터라 나도 나다움에 질려 머쓱하게 웃어 버렸다.


나와 친구 유진은 늘 선생님 바로 앞 자리에 앉았다. 범생이라거나 학구열이 불타는 멋진 이유가 아니라 그녀의 도움이 시도 때도 없이 필요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선생님’하고 애달프게 부르려는 이유에서였다.


코바늘 원형 뜨기의 꽃은 매직링이다.


한 줄씩 횡 방향으로 떠나가던 지난 가방 뜨기와 달리 모자는 가운데 가마 부분부터 둥글게 둥글게 떠나가는 형태였다. 코바늘로 둥글게 떠나가기 형태에서는 첫 고리를 만드는 매직링 뜨기가 가장 중요하다. 이름도 매직링**, 마법의 고리는 아직 초보자가 단단히 만들기는 쉽지 않을 거라며 선생님이 바늘을 뺏어 들고 물꼬를 터주셨다. 다행히도 코를 뜨는 방식은 직전에 배운 사슬뜨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네모로 이루어져 있던 나의 뜨개 세계에 동그라미가 편입되는 시간. 

**매직링: 코바늘 원형뜨기의 기본 첫 시작, 실을 두줄 둥글게 굴려 코가 시작할 수 있는 기본 틀을 만드는 과정이다.


선생님은 다소 어려운 실을 골랐다 하셨다, 너무 볼륨감 있고 약한 실이라 손의 힘에 따라 그 굵기가 자주 바뀌어 결과물이 고르지 않을 수 있다고.


그렇지만 너무 예쁜걸요!

뻔뻔한 나의 대답에 선생님은 역시나 쿨한 말투로 그럼 그냥 한번 해보셔요! 답했다. 나는 그녀의 이런 덤덤함이 좋다. 뭐든 한 번 떠보자는 자세, 그게 뜨개 세상이 열어준 용기다.



하지만 예뻐서 좋다던 나의 마음은 금세 후회로 변했다. 일단 지난주와 결과물의 형태와 실이 달라져서인지 손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확연히 달라 몇 번을 다시금 떠내야 했다. 두어 시간 뜨고 나서야 손에 잡힌 동그란 평면의 편물은 뽀송한 실 덕에 귀여워 보였으나 어설펐다. 정수리를 덮을 정도의 크기까지 뜨고 나자 선생님이 한 말씀이 어떤 의미였는지 눈으로 확인이 됐다.


중간중간 네모 모양의 공백이 있어 어설픔이 드러날 구석이 적었던 가방과 달리 빽빽이 코만으로 이루어진 모자에서는 뜬 이의 실력이 그대로 드러났다. 코 사이사이 생기는 구멍 크기도 제각각, 코의 두께와 높이도 제각각이었다. 실력이 들키는 건 둘째치고, 이 모자를 내가 과연 쓰고 다닐수가 있을까 고민이 될 정도였다. 연분홍의 색이 얼추 귀여움으로 대충 어설픔을 상쇄시켜 줬지만 후회와 황당함, 약간의 뿌듯함이 뒤범벅 됐다. 모양새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집에 돌아가서도 뜨개를 할 마음이 영 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두께의 바늘로 이전에 배운 가방을 또 다른 실로 또 떠내려가며 위안했다.


맞아, 나 이제 평면 뜨기는 마스터 했잖아!


모자는 뜨다 말고, 갑자기 또 떠버린 빨간색의 가방


모자는 챙 부분을 뜨기 직전쯤 고이 접어두고, 자신감을 끌어 올려보려 엉뚱한 뜨개(가방)만 이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더 형편없어진 모자는 선생님께 ‘이걸 다 풀어야 할지’, 다른 방법은 없을지 방법을 여쭈고 싶었다. 한참을 기다려 다음 수업 시간. 풀러서 다시 뜨는 해결 방식인 <푸르시오>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 했는데 이번에 그녀의 대답은 꽤나 단호했다. 


(당연히) 풀어야죠?


이로써 알게 됐다. 코바늘로 뜬 작품에서 푸르시오 없이 그 중심부를 고칠 방법은 없었다. 어떤 면에서 우리 일상 같다. 대충해도 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일에 있어서는 빠르고 신속한 것보다 천천히라도 바르게 해나가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그걸 행하는 건 한순간인데 그걸 고쳐내려면 다시 한번 되돌아가는 과정과 에너지가 두 배로 소요된다.


무작정 훅훅 나아가기만 하면 됐던 전주와 달리, 동일한 구간을 한참 되돌아 똑같은 행위를 반복한다고 생각하니 시무룩해졌다. 그저 앞을 향해 달리는 것에 익숙한 나는, 이런 작은 정지에도 쉬이 좌절하곤 했다. 목표가 뚜렷하고 성취욕이 강해서 그 과정 속에서 마주하는 실패, 좌절, 후진 따위가 아렸다. 그저 나아가고만 싶었다. 한껏 올라왔던 투지가 한 꺼풀 꺾여 늘상 올라가있던 입꼬리가 저 밑까지 달음박질쳤다. 그 찰나를 뚫고 선생님의 또 다시 뜨면 되죠! 하는 쿨내나는 대답이 왔다. 옆에 친구 유진도 있겠다, 여기서 지칠 이유는 없다.


이건 따로 기한도, 평가자도 없는 나만을 위한 과제니까. 언제고 그 결과에 닿기만 하면 됐다. 심지어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끝까지 푸르고 풀러 뭐라도 다른 걸 만들면 되니,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니 다시금 힘이 솟았다. 정말 쉽다, 나.


뽀송하던 실은 이미 한차례 뜨고 푸르는 과정에서 이미 얇고 길게 늘어져 버렸지만 다시 유의할 점을 마음에 새기고 뜨기 시작하자 모자는 꽤 그럴 듯 해졌다. 코의 형태와 크기가 고르게 되자 금세 그럴듯한 모자로 보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보이면 시원하게 다시 푸르고 뜨고를 반복했다. 처음 모자를 뜨기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열흘쯤 되었을 때 드디어 숙제가 끝났다. 비뜨개인이 본다면 잘 했다고 표현해 줄 정도의 결과물이니 됐다. 


깔롱 부리겠다면 끝단엔 팝콘 실로 데코까지 해줬다


이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당당하게 쓰고 다닐 수 있다


뜨개를 뜨면 처음으로 마주한 좌절을 이겨냈다. 모든 것이 선생님과 든든한 지원군의 존재 덕이다. 일상에서도 망가진 경험을 했을 때 단호하게 당장 돌아가라고 말해주거나 든든하게 옆을 지켜줄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이겨내기 쉬울까 잠시 상상해본다. 우리는 살면서 푸를 수 없거나, 푸를 수 밖에 없는 과제를 종종 마주한다. 실제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라도 그 실패를 곱씹다보면, 쉽게 좌절하게 된다. 그럴 때 스스로에게 단단하게 ‘그냥 하면 되지!’ 해주는 존재가 되어주기로 다짐했다, 또 누군가의 이런 다짐에 멀리서 응원을 보낼 수 있는 뜬 놈이 되겠다고.


언젠가는 이 뽀송한 연분홍 모자에 어울리는 머플러를 뜨며, 수차례 푸르시오 해야 하는 날에도 다음날 씩씩하게 힘을 내서 떠낼 용기가 생겼다. 결국에는 기어코 머리부터 발끝까지 뽀송뽀송한 인간으로 추운 계절을 나줄테다.



복잡하게만 보였던 실타래가
다시 차분히 마음 먹고 톺아보면 그저 단순한 실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 글을 마주한 당신도 돌아가기 두려운 상황을 마주했다면
'그까이꺼! 다시 떠버려!'하는 마음으로 해낼 수 있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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