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체리 Sep 20. 2024

코바늘 파쇼나토

속도와 상관없이 아주 열정적으로!

작가소개.
리틀포레스트 같은 삶을 사는 게 소망이었고, 최화정씨 같은 명랑어른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그것들에 한 발짝씩 가까워지는 중. 매일 달라지는 계절에 맞춘 작은 미(美)식을 즐기고, 조금씩 나아가는 뜨개에 그 뜻을 두며 살고 있다.


첫 수업이 있던 날 집에서부터 약 50분의 거리를 달려 낮달막한 건물들이 올망졸망 자리한 연희동에 다다랐다. 8월의 중턱이라 매일이 덥던 와중 그날만은 비가 왔다. 어깨며 바지 끝단이며 축축하게 젖어버릴 만큼 대차게 내리던 비, 온몸이 눅눅하게 젖은 상태로 들어선 공방에는 지난번 방문과 또 다른 샘플들이 걸려 있었다. 계절과 날씨에 맞추어 매장도 매무새를 달리하는 듯했다. 지난번과 달리 꽈배기가 넝쿨째 들어간 목도리와 털이 숭숭 난 벙거지 모자가 여름 소품들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아, 정말 지금부터 떠야 가을과 겨울에 맞추어 완성할 수 있겠구나.


수업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건만 이런저런 도안을 뒤적이며 20분, 실 고르는데 10분, 필요한 도구들을 찾다 기어코 수업에 늦고 말았다. 인터넷에서 수강신청을 수개월 망설이며 수차례 사진으로 마주했던 선생님은 상상보단 조금 더 시크했다.


저희, 뜨개 처음이에요


처음이라는 당돌한 대사에도 그녀는 여유롭게 다른 수강생들의 작품을 돌아가며 한참 봐주시고 나서야 마지막 순서로 우리 곁에 앉았다. 서른이 훌쩍 넘었지만 못하는 게 자랑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에서 이것저것 궁금증을 풀어뒀다. 어떤 질문에도 그녀는 막힘없이 현답을 툭툭 내놓았다. 예를 들자면, 내가 엉키면 어떡하냐고 물으면 그녀는 풀면 되죠? 정 안 풀리면 자르고 다시 실을 연결해 시작하면 되고요! 하는 단순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첫 수업에 내가 고르고 고른 작품은 가방. 코바늘의 세계에선 아주 기본적인 단위인 ‘사슬뜨기’와 ‘두줄뜨기’만 할 줄 알면 끝낼 수 있는 가방이었다. 사슬뜨기란 바늘로 새로운 실을 끌어와 기존에 걸려있던 코와 함께 두었다가 사슬 모양으로 빼내는 것, 두줄뜨기는 이 사슬을 2번 연달아 만들어 기둥처럼 만드는 방식. 앞으로 여러 차례 등장할 이름들이니 기억해 두시길.


첫 수업에서 고른 실과 작품


선생님은 코바늘을 하려면 뜨는 손보다 뜨지 않는 손을 다스리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그저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여러 가지 시도를 끝으로 나만의 방식을 찾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답했다.


오른손잡이가 코바늘로 뜨개질을 하려면 왼손으로는 떠나갈 실들을 느슨한 듯하면서도 단단하게 잡아두고, 다른 한 손으론 코바늘을 날쌔게 놀리며 떠나가야 한다. 두 손에 적절한 힘으로 균일하게 떠나가는 것이 양질의 매끈한 결과물을 내는 비결이다. 간단하게 들리지만 초보에겐 가장 어려운 지점이다. 잘하고 싶어 한 코 한 코 집중하다 보면 이 힘조절에 문제가 생기고 만다. 어떤 부분은 너무 꽉 조여 다음 뜨기를 하기 위해 바늘을 찔러 넣을래도 들어가기 어려울 만큼 단단해지고, 어떤 부분은 너무 느슨하게 떠져 무언가 빠진 것처럼 틈이 생기고 만다. 이만했다가 저만했다가 올록볼록 크기가 제멋대로일수록 초보가 뜬 작품일 확률이 높다.


(씩씩한 목소리로) 선생님! 이거 어떻게 하죠?
(아련한 목소리로) …선…생…님

가지각색의 목소리가 강의실 곳곳에서 들려왔다. 각각의 대사는 조금씩 달랐지만, 애타게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수시로 튀어나온다. 시크한 선생님은 ‘어쩔 수 없죠, 뭐’하는 생활의 지혜 같은 답을 내뱉으며 결국에는 답을 찾아주었다. 뜨개를 하다 실수가 발생하면 뜨개초보자들은 대개 <푸르시오> 권법을 사용한다. 한 줄이고 댓 줄이고 죽죽 풀러내고 다시 뜨는 방식. 그래서 풀러야 할까요? 하는 절망적인 목소리가 수시로 들려왔는데 그녀는 경우에 따라 풀지 않고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는 확실한 전문가였다. 더욱이 아주 작은 실수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뜨개 꿈나무들의 마음을 달래는데 재능이 있었다.


실이라도 멋지면 결과물이 조금 나을까 싶어 가죽처럼 느껴지는 뻣뻣하고 두꺼운 실을 골라서인지 겨우 한 시간 정도 뜨고 나니 손가락이 아파왔다. 이렇게 얇은 실 때문에 손 마디마디가 아파질 수 있다니! 내 가방은 네모 모양을 연달아 떠내는 방식이라 선생님께 배운 1시간치의 지식으로 쭉 뜨기만 하면 됐다.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손을 허공에 대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낮 동안 갓 익힌 감각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다 저녁이 되자마자 소파에 앉아 네모 만들기에 열중했다.


넷플릭스에서 적절한 길이의 드라마 시즌 1을 켜두고 손을 놀렸다. 몇 회가 속절없이 지나 두둥-하는 소리가 몇 번이고 지나가는 동안 몇 번을 ‘여기까지만 떠야지!’하는 의미 없는 다짐만 번복했다.


'여기까지만 떠야지!'
하는 의미 없는 다짐


가부좌 자세로 한참을 미동 없이 빳빳이 앉아있어 두 다리에 피가 안 통하는 느낌이 들고서야 일어섰다. 굳은 허리를 움직이며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눈앞 천장으로 내 손과 그 손에 얽힌 실타래가 환영처럼 보였다. 밤마다 잠을 쪼개 서너 시간씩 뜨고 나니 첫 수업을 들은 지 겨우 3일 만에 가방의 모양이 완성됐다. 힘조절이 부족해 어떤 부분은 촘촘하고 도톰한데 또 어떤 부분은 성기고 죽죽 늘어나버리는 어설픈 가방, 분명 도안과 같은 방법으로 떴는데 결과물은 사뭇 달랐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하나뿐이라 생각하니 자꾸만 애정이 갔다. 한 줄 한 줄 떴을 때의 내 감정과 감각을 온전히 알 수 있는 작품이라니 얼마나 귀한가.


코를 120개쯤 엮어 기다란 가방끈의 형태까지 갖추고 나자 그제야 며칠간 뻣뻣했던 허리가 제대로 펴지는 기분이었다. 매일밤 나보고 '코바늘걸'이라 놀리던 연인은 3일 만에 뚝딱 무언가를 만들어낸 나를 보고 놀랐다. 그의 놀란 목소리에 비로소 뜨개의 세상에 아주 살며시 한 걸음 들어선 것 같아 진심으로 기뻤다.


악보에 쓰이는 말 중 파쇼나토 passionate란 말이 있다. 템포와 별개로 열정적으로 감정을 담아 연주하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나는 뜨는 속도와는 상관없이 매우 열정적인 감정 과잉의 상태, 코바늘 파쇼나토다.


나는 코바늘 파쇼나토다.


1주차 코바늘 파쇼나토의 열정




이전 01화 나랑 한 번 뜰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