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의 꿈
8월. 억새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둥근 보름달이 떠 있는 문이다.
시커먼 언덕인 줄 알았는데 억새 들판이었다는 걸 달빛을 통해 알게 되었다.
"보름달 보면서 소원 많이 빌었는데."
"그래. 나도 추석때 소원 빌었던 기억이 나."
감시자와 나는 동그란 보름달을 보며 열쇠를 보여주었다. 보름달이 점점 더 밝게 빛나더니 어느새 문이 열려있었다.
내 방이었다.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의.
책상과 의자, 침대는 같았지만 벽지는 은은한 회색빛이 아닌 구름이 그려진 하늘색이었고 교과서와 동화책 등이 꽂힌 책꽂이 자리에는 장난감 정리함이 놓여있었다.
"여긴 내 방인데. 내가 있어도 되나?"
"네 방이긴 하지만 이곳에선 너와 난 보이지 않아."
"그럼 투명인간이란 말이야?"
"쉽게 생각하면 투명인간과 비슷하지만, 사실 여긴 달에 비친 8살 때의 네 모습과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꿈이야. 앞으로의 꿈들에서도 너의 기억과 부모님의 기억 속 너의 과거가 보일 거야."
"왜?"
"다 큰 네가 너의 과거에 나타나면 과거의 네가 널 알아볼 테니까. 그럼 과거에 영향을 주게 되거든."
"그렇구나. 1학년이면 5학년인 나를 알아볼 수도..."
"어휴. 너보다 네 부모님과 외할머니가 금방 알아볼 거야!"
"그렇겠네..."
"엄마, 깜깜해서 무서워요. 커튼 열고 잘래요."
"깜깜해야 잠을 푹 잘 수 있는데. 무서우면 엄마, 아빠랑 같이 잘까?"
"아뇨. 내 방에서 잘래요. 커튼을 열면 달이 보여서 덜 무서워요."
"그래? 그럼 커튼 열어줄게."
새 아파트의 우리 집은 층수가 높아서 하늘이 보였다. 예전 집에서는 앞집 건물만 보였는데 내 방에서 하늘을 보면 별도 보이고 달도 보여서 늘 내 방이 좋았다.
"오늘은 보름달인가? 달이 동그랗네.
잘 자. 보름달!"
어린 나는 달을 보고 인사를 하고는 잠이 들었다.
#거실#
"여보, 나 못 믿어요?"
"이건 믿고 못 믿고 가 아니라 너무 위험부담이 커요. 잘못되면 우린 뭘로 먹고살아요?"
"잘못될 리가 없다니까요!"
"우리 빵가게를 팔자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주식에 투자하는 거예요. 사실 주식으로 번 돈으로 아파트도 살 수 있었잖아요. 빵가게로는 매달 먹고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큰 욕심부리지 마요. 주식이 계속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다고 당신이 주식 전문가도 아니잖아요."
"지금 투자하기 딱 좋은 시기이고 내 주변에도 번번한 회사도 그만두고 주식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회사도 그만두고요?"
"회사 퇴직금으로 연봉의 몇 배를 벌고 있다구요."
"그래도 빵가게는 우리 전 재산인데. 아닌 것 같아요."
"대성이도 초등학교 1학년이고 좀 더 크면 학원도 보내야 하고 챙겨야 하잖아요. 하루 종일 빵가게에 매달려 대성이도 못 살핀다고 당신도 집에서 살림하면서 대성이 챙겨주면 좋겠다고 늘 말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난 겁나고 무서워요."
"나 못 믿어요? 그 돈 날리면 우리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데 내가 함부로 하겠어요?"
늦은 밤 아빠는 엄마를 설득하고 계셨다.
엄마의 걱정과 불안한 표정만큼 짙은 어두움이 조금씩 우리 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날 안방#
"엄마,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안 좋은데 국수가게 그만 접어요. 이제 그만해요."
"아직 괜찮아. 이거라도 하니까 움직이지. 집에 가만히 있으면 뭐하냐?"
"집에 가만히 있긴 이제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 즐기면서 살면 되죠."
"아이고. 됐다. 난 여기가 편해."
"편하긴 뭐가 편해요. 가게 부엌 뒤 조그만 단칸방이."
"혼자 있는데 이 정도 방 하나면 충분하지."
"요즘 김서방이 돈 잘 벌어요. 내가 걱정 많이 했었는데 빵가게 할 때보다 여유가 있어요.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니. 됐어. 난 혼자가 편해. 김서방도 불편하고."
외할머니와 엄마가 통화를 하고 계셨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계속 설득하고 계셨고 어두운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거실#
"여보, 어머님 가게 정리한 돈, 은행에 있어요?"
"네. 1억은 안되지만, 몇 천만원도 큰돈인데 은행에 넣어놔야죠."
"은행 이자도 낮은데 은행 좋은 일만 시키는 거예요. 나한테 투자해요. 내가 두 배로 불려줄 테니까."
"됐어요. 자기 능력 인정하지만 엄마 돈까지 투자하고 싶진 않아요. 그 돈은 엄마를 위해서 다 쓸 거예요."
"아~이번에도 대박 날 건데. 아까운데..."
"대박 아니어도 돼요. 너무 욕심부리지 마요."
아빠는 주식에 점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었다.
그렇게 외할머니는 내가 1학년 때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엄마가 교문 앞에 서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외할머니가 맛있는 간식도 챙겨주시고 내가 좋아하는 국수도 자주 해주셔서 더 좋았다.
하지만 외할머니와의 즐거운 시간은 길지 않았다.
#외할머니방#
"여보, 엄마가 이상해요!"
12월의 어느 날 밤, 방에서 열심히 컴퓨터 모니터만 보던 아빠가 급하게 나왔다.
"어머님, 어머님!"
아빠가 외할머니를 흔들어보았지만 외할머니는 죽은 사람처럼 바닥에 축 늘어져 계셨다.
어린 나는 외할머니께서 주무시고 계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는지 굳은 표정으로 한쪽벽에 붙어 있었다.
"엄마, 외할머니 왜 그래요?"
엄마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어떤 말도 없이 허둥지둥 119로 전화를 했다.
그날 밤, 아파트 전체에 요란한 싸이렌이 울렸고 외할머니는 병원으로 실려가셨다.
"심정지입니다. 계속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지만 심장이 뛰지 않습니다. 오랜 심폐소생술로 갈비뼈는 금이 간 상황이고 마지막으로 충격기를 쓰고도 심장이 뛰지 않으면...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엄마는 응급실 앞에 주저앉았고 아빠는 의사 선생님께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하고 계셨다.
그렇게 외할머니는 내가 2학년이 되는 걸 보지 못하고 갑작스레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날 밤 혼자 있던 나를 데리러 온 아빠와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며 밝은 보름달을 보았다.
"8월 그림의 뜻은 달밤이야. 그림 그대로 달밤.
외할머니의 죽음은 나에겐 깜깜한 어둠 속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무서웠던 기억이지만 외할머니는 보름달 같은 분이셨어. 그러니까 보름달이 있는 한 외할머니도 내 마음속에서 환하고 아름답게 함께 계신다고 생각해. 이게 열쇠의 의미 아닐까?"
그 말이 떨어지자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성아, 할미도 그래. 항상 널 지켜보고 있고 너의 앞날을 환하게 비춰줄 거야. 저 보름달처럼."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크게 크게 소리쳤다.
"외할머니, 사랑해요~!"
눈물이 뺨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외할머니도 들으셨을 거야. 이번 열쇠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녹아있는지 몰랐어.
죽음은 뭘까? 난 이미 죽은 자인데 아직 잘 모르겠어."
'죽음? 죽음이 뭐지? 끝이라 생각했는데 끝이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뭐지?'
나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감시자의 말이 더 심오하게 들렸다.
감시자와 나는 그 뒤로 한참을 8월의 문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보름달을 보았다.
달빛 사이로 열쇠가 반짝이며 나타났다.
머리밑이 따뜻해지면서 어디선가 향긋한 꽃향기도 함께 다가왔다.
구월의 꿈
9월. 노란 국화꽃이 가득했다. 국화꽃향기가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열쇠를 보여주자 열쇠는 그림의 술잔 속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꽃향기는 사라지고 술 냄새가 심하게 났다.
#식탁#
"여보, 그만 마셔요. 어머님도 당신이 매일 술 마시는 거 알면 속상해하실 거예요."
"그런 말 마요. 죽은 사람이 뭘 알고 속상해해."
"그래도 이건 아니지. 당신 맘은 알겠지만."
그랬다. 엄마는 외할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우울증이 왔고 우울증이 좀 나아지자 매일 혼자 술을 드셨다.
술이 약해서 한잔만 먹어도 얼굴이 빨개지는 엄마는 매일매일 마시는 바람에 주량이 반 병에서 한 병 정도로 늘어났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에게서 술냄새가 많이 났다. 그리고는 울다 잠들고. 바깥 외출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걱정되기보다는 싫었다.
아빠는 내가 여름방학을 하자 엄마와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에 다니셨다.
술을 좋아하던 아빠는 덩달아 술을 안 드셨고 엄마는 6개월 동안 꾸준한 치료를 하며 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빠, 난 절대로 술 안 마실 거예요!"
"어른이 되면 아빠랑 한 잔 해야지. 아빠는 그날을 기대하는데?"
아빠는 나를 보며 주먹을 내밀었다. 나는 주먹을 부딪히며 말했다.
"술에 취한 엄마를 보며 매일 매일 싫었어요. 난 술이 정말 싫어요. 술은 세상에서 제일 나빠요.
엄마를 슬프게 만들고 이상하게 만들었잖아요.
술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그건 술 탓이 아니야. 술은 적당히 마시면 사람에게 약이 되지만 과하게 마시면 독이 되지. 그 과함이 나쁜 습관이 되면 중독이 되는거란다.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마시는 사람에게 달린 거야."
"그럼 엄마 잘못이에요?"
"음. 엄마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나쁜 습관을 길러 중독이 되었으니까.
술은 중독이 되면 나쁜 마법을 부리거든.
계속 술을 마시게 만드는!
특히 슬픈 사람들은 그 마법이 더 잘 걸려."
"그럼 게임도 중독이 되요?"
"그럼. 게임도 중독이 되면 게임만 하고 싶어져서 밥도 먹지 않고 하게되고 친구들과도 놀지 않고 게임만 하게 되지."
"우리 반 친구중에도 게임 중독인 아이가 있어요. 친구들과 잘 놀지도 않고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기도 하고. 신경질과 짜증을 많이 내요."
"그렇구나. 그 친구가 게임에 빠져 중독이 되었다고 그 게임이 나쁜 걸까?모든 게임이 없어져야 할까?"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 친구가 중독에서 빠져나와야 되요."
아빠는 나의 눈높이에서 바르게 이해한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엄마도 마찬가지였어. 외할머니는 엄마의 엄마잖아. 엄마가 돌아가셔서 그 슬픔이 너무 컸겠지?"
"네."
"그 슬픔을 누구나 이겨내기가 쉽지는 않지만,
술로 해결하려고 한 건 엄마의 잘못된 선택이었어.
술은 사람이 기쁠 때도 슬플 때도 그냥도 마시는데 술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사람이 적당히 조절해서 마셔야 중독이라는 나쁜 마법에 안 빠지는 거야."
"그럼 엄마는 나쁜 마법에서 빠져나온 거에요?"
"그렇지. 너도 게임 더하고 싶어도 게임 시간이 끝나면 그만 하는 것처럼 엄마도 이제는 스스로 조절할 수 있고 잘 지키지!"
"네. 그럼 난 커서 아빠랑 술 한잔 할게요."
"음~그러자. 약속~"
어린 나는 아빠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었다.
"9월 그림은 술을 의미해. 술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었는데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 술마시는 엄마에 대한 싫은 감정이 술이 싫고 없어져야하는 거라며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아빠와 약속했던 것처럼 어른이 되면 아빠에게 술을 배워 바르게 마셔보고 싶어 졌어."
"술에 대한 안좋은 감정이 있었구나."
"응. 엄마에게서 술냄새가 나니까 그게 너무 싫었어. 사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정말 싫었거든.
엄마의 상황과 마음을 이해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아빠와 했던 약속도 까먹고 있었는데...
이번 열쇠의 의미를 찾으면서 엄마와 술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바꾸게 되었어. 아빠와의 소중한 약속도 기억났고. 열쇠의 의미를 잘 찾았지? "
머리 밑이 따뜻해졌다.
이번에도 잘 해냈구나하는 안도감이 드는 순간, 감시자는 나를 재촉했다.
"네가 철이 드나 보다. 이제 남은 시간은 세 시간이야. 세 개의 의미가 남았으니 시간은 모자라지 않을 것 같은데 모르지. 서두르자."
감시자는 초록색 술병을 건네주었다.
"웬 술병?"
"깨봐."
"왜? 술병 깨트리면 위험할 수 있어. 유리 파편도 튀고."
"이건 괜찮아. 열쇠가 들어있는 술병이라."
그랬다. 초록색 술병 속에 열쇠가 들어 있었다. 나는 건네받은 술병 속 열쇠를 확인하고 술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술에 대한 나의 안 좋은 기억들이 모두 박살 나듯이 술병은 박살 났고 그 자리엔 반짝이는 열쇠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