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12-9화 시월과 십일월의 꿈

by 해어화
시월의 꿈

10월. 빨강과 주황, 노랑의 화려한 단풍 든 나무들이 울창하고 예쁜 사슴이 어딘가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의 문이다.



아빠의 방이었다.

아빠의 방에서도 아파트의 단풍이 내려다 보였다.

아빠는 아빠의 방으로 출근을 하고 아빠의 방에서 퇴근을 했다. 가끔 밖으로 나가시기도 했지만 주로 재택근무를 하셨다. 증권회사의 펀드 매니저도 아니고 주식 전문가도 아니었지만 하여튼 주식으로 생계비를 벌고 재산을 불리고 계셨다.


나는 아빠의 방이 부러웠다. 방안에는 많은 최신 컴퓨터와 모니터, 프린터 등 IT 관련 기기들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방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종이가 방문에 붙어져 있었고 중요한 기기들과 데이터가 많아서 들어오면 안 된다면서 아빠는 늘 문을 잠그고 일을 하셨다.

아빠는 속상해하는 나를 위해 노트북을 사주셨다.


"아~ 요즘 주식시장이 엉망이네."

아빠는 근심과 걱정이 잔뜩 낀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5교시 수업을 마치고 일찍 하교해도 3시 30분까지는 아빠의 얼굴을 보기 힘든데 그날은 아빠가 문을 열고 먼저 나왔다.

"왜요? 요즘 경제상황이 나쁘다고 뉴스에서 보도하던데... 많이 안 좋아요?"

"응. 돈을 빼야 할 것 같아. 더 떨어지기 전에."

"지금 손해가 심해요?"

"아뇨. 이제까지의 수익률에 비하면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더 넣어야 할 시점 같기도 하고.

그런데 걱정되니까 절반 정도는 팔아서 현금으로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해요. 당신이 제일 잘 알겠죠."

아빠는 한 숨을 내쉬었고 다소 걱정스러워 보였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아빠는 주식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주식을 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넣어야 할 시점이란 생각에 빠져있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경제적인 권한을 모두 맡기시고 아빠가 주시는 생활비로 가정을 이끌어가셨다.

생활비가 모자라지는 않았다. 우리 집을 사고 나서 아빠의 차도 업그레이드될 정도였으니.


"준성아, 내가 맡긴 돈 돌려줘야겠는데."

"왜? 돈 쓸 일이 생겼어?"

"응. 그런 것도 있고 요즘 주식 시장 낌새가 안 좋으니까 아내가..."

"무슨 말인지 알았어. 네 계좌로 넣어줄게."

아빠는 전화를 끊고 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대성이 엄마에게 솔직하게 말할까? 아니야. 그럼 걱정할 테고 잔소리도 심할 텐데... 우선 거짓말로 넘어가고 해결해보자. 그래! 괜찮을 거야."


그렇게 내가 3학년이던 가을과 겨울은 아빠의 근심과 걱정스러운 표정만큼 쓸쓸하고 차갑게 변해가고 있었다.



"10월 그림은 근심과 걱정을 의미하는 것 같아. 아빠의 얼굴에서 그게 느껴져. 아빠가 거짓말을 한 건 몰랐어.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더니 맞는 말이네. 이번 열쇠는 거짓말의 나쁨과 거짓말로 인해 근심, 걱정 등의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남을 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 같아."

감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표정을 보니 왠지 다음 꿈에는 안 들어가고 싶네. 더 큰 충격과 걱정이 기다릴 것 같아서."

"아니야. 지나간 일인걸. 난 알고 있어.

작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래서 괜찮아."

"너 정말 의젓해졌구나. 그래 이왕 부딪힐 거면 주저하지 말자."

감시자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열쇠는 어김없이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피하고 싶기도 했지만, 열쇠를 쥐었다.


십일월의 꿈방

11월. 오동 나뭇잎 와 봉황이 그려진 문이다.


"아, 나 11월 그림의 의미는 알아.

외할머니께서 <똥 나왔다. 돈 들어오겠네~> 하셨거든."

"그래? 그럼 저 동물은?"

"닭!"

"땡! 틀렸어."

"그럼? 뭐야?"

"봉황!"

"뭐? 봉황은 전설 속 새잖아."

"맞아. 봉황은 벽오동 나무에만 앉는다는 전설이 있대."

"그럼 저 나뭇잎이 벽오동 나뭇잎이겠구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 벽오동 나무에 앉아있던 봉황이 날아올랐고, 그러자 문이 열렸다.



법원이라 적힌 건물이 보였다.

두 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다.

"저기 앉아서 얘기 좀 할까?"

"더 할 얘기 없어요."

"그래도 대성이에게는 충격일 텐데..."

"대성이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그렇게 큰 빚을 져요?"

"나도 이렇게까지 될지 몰랐지. 그 얘긴 그만해. 서로 자존심 상할 만큼 상했고 상처 줄 말도 더 없잖아? 그래서 여기 와 있는 거고."

"당분간은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

나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내가 정리되면 대성이에게 잘 얘기할게요.

그런 다음 당신이 대성이를 만나요."

"알았어. 그러자고."


엄마와 아빠는 이혼 서류를 접수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내가 11살, 4학년일 때 두 분은 이혼을 했다. 결정적인 원인이 "돈"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서로에게 준 깊은 상처" 때문이었다. 서로 정이 떨어져 헤어질 만큼!


#우리집#

"대성아, 아빠가 주식을 실패해서 큰돈을 날렸어. 우리 집도 없어질 뻔했는데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겨주신 생명보험금이랑 국수가게를 정리한 돈으로 겨우 막았어."

"그래서 아빠랑 엄마랑 자주 싸운 거예요?"

"응. 아빠가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고 외할머니 보험금까지 달라고 했거든.

너도 친구와 심하게 싸우면 그 친구 보기 싫지?,

안 만나고 싶지?"

"네."

"지금 엄마와 아빠도 그래."

"그럼 집에서 서로 얼굴 보지 말고 말도 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화가 풀릴 때까지."

"친구는 친구 집에서 따로 사니까 안 보고 말도 안 해도 불편하지 않지만, 한 집에서 사는 엄마, 아빠는 힘들어. 그리고 아빠에게 돈을 투자한 사람들이 돈을 받으러 찾아올 수도 있고.

그래서 아빠는 우리 집에서 같이 안 살 거야."

"싫은데. 난 아빠랑 엄마랑 같이 살고 싶은데..."

"대성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엄마와 아빤 이혼했어."

"이혼요?"

엄마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너에게 다 설명할 수는 없는데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미안하지만 아빠를 더 미워하기도 싫고 상처 주는 말을 하면서 매일 싸우기도 싫어.

그리고... 엄마도 이제 일하러 다녀야 해.

그래야 너랑 먹고살 수 있거든."


그렇게 우리 가족은 학교에서 들어 봤던 아니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한부모 가정"이 되었다!


아빠를 한 동안 못 만나다가 아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성아, 잘 지냈어?"

"네. 아빠는요?"

"응. 아빠도 잘 지내."

그 사이 왠지 아빠와 어색해진 느낌이었다.

"그럼. 내일 학교 마치고 집 앞 햄버거 가게에서 만날까?"

"음... 집 앞 햄버거 가게 말고 영어학원 근처 햄버거 가게에서 만나요."

나는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지하철로 4코스만 가면 되는 영어학원 근처로 장소를 바꾸었다.

부모님의 이혼을 아무도 모르길 바랬다.

"어. 그래. 몇 시에 만날까?"

"3시 30분요."

"그래. 그럼 내일 3시 30분 영어학원 앞에서 만나자."

"네."

아빠와의 짧은 통화를 마치고 집으로 왔다.


엄마는 친구의 소개로 근처 백화점 매장에서 일하셔서 퇴근이 늦었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오기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늦게까지 친구들과 놀 다 올 수 있어서 좋았다.

작년과 완전히 달라진 집 분위기에 나도 적응을 해야 했다. 나는 평소보다 더 활발하게 학교생활을 했고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다행히 내가 한부모 가정이라는 사실을 아는 친구는 없었고 선생님만 알고 계셔서 학교에서는 크게 힘들지 않았다.


#학원 앞#

"대성아!"

"아빠!"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아빠를 보자 반가움에 큰 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많이 컸네. 배고프지? 아빠가 햄버거 사줄게."

"배가 많이 고프진 않아요. 그래도 하나는 먹을 수 있어요."

"4학년이 되더니 배가 커졌네."

아빠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흐뭇하게 바라보시더니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불고기 치즈버거 세트와 아빠의 치킨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버거가 나올 동안 아빠는 나의 학교생활과 친구들에 대해 물어보았다. 대답을 하다 보니 버거가 나와서 맛있게 먹었다.

배가 많이 고프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한입 크게 먹는 순간, 햄버거를 뚝딱 먹어치웠다.

아빠도 그랬다. 콜라를 마시며 감자튀김을 먹기 시작했다. 아빠의 말투가 진지해졌다.

"대성아, 아빠가 밉지 않았어?"

"네. 엄마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줘서요."

"그랬구나. 미안하다. 아빠의 잘못으로 이렇게 되어서."

"아빠는 어디서 살아요?"

"응. 옛날 외할머니 국수가게 하던 동네 기억나?"

"네."

"거기 근처에 살아."

"네."

"대성아, 아빠가 엄마가 술에 중독되었을 때처럼 돈에 중독이 되어서 큰돈을 벌려고 거짓말도 많이 하고 너무 큰 욕심을 부렸어. 그래서 친척들과 친구들 돈까지 끌어 투자했는데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돈을 날리게 되었어. 그때라도 빨리 네 엄마랑 주변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얘기하고 해결했으면 빚이 적었을 텐데. 끝까지 거짓말을 하면서 붙들고 있었어. 외할머니 보험금도 탐내고."

"엄마에게서 외할머니 보험금 얘기 들었어요."

"그랬구나. 외할머니의 죽음 때문에 엄마의 상처가 컸는데 그 보험금을 아빠가 쓰려고 했지. 그러면서 엄마에게 더 큰 상처가 되었고 또 싸우면서 심한 말들을 했어.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실망, 아니 정이 뚝 떨어진 거지."

"그건 아빠가 잘못했네요."

"그래. 그 돈까지 손댔으면 우리 집마저 날리고 너랑 엄마는 길거리로 나왔을 거야.

외할머니께서 끝까지 우릴 도와주신 거지."

아빠가 자꾸 자신이 잘못한 점들만 얘기를 해서 나는 얼른 엉뚱한 질문을 했다.

"음... 아빤 어떻게 먹고살아요?"

"아빠, 제과제빵사잖아. 다시 빵집에서 일해."

"엄마도 일하는데. 그럼 빚도 금방 갚고 다시 같이 살 수 있어요?"

"금방은 힘들 것 같지만 엄마와 아빠가 열심히 일하니까 꼭 그렇게 될 거야. 그러니까 엄마 말씀 잘 듣고 엄마 많이 도와드려. 지금 넌 아빠 대신이야."

"네. 저도 이제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도와드려요. 엄마가 다리 아프다고 하면 주물러도 드리고요."

"대성이 진짜 멋진 남자네. 아빠가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네. 걱정 마세요. 아, 아빠도 중독에서 빠져나올 거예요. 엄마처럼요."

"그래. 성실히 돈 벌어서 빚도 갚고, 엄마 마음도 풀어주고. 우리 대성이랑 같이 살아야지."


아빠를 만난 뒤, 내 맘은 한결 편해졌다.

엄마와 아빠의 사이는 그대로였지만 두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11월 그림의 의미는 똥! 아니 돈이야.

돈이 많으면 좋겠지. 더 넓고 좋은 집에 큰 자동차에 브랜드 옷과 가방에.

하지만 돈에 너무 욕심을 부리면 돈보다 더 소중한 걸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아빠도 지금은 돈보다는 가족이 먼저인 것 같아.

난 아빠를 믿어. 시간은 걸리겠지만 우리 가족은 다시 함께 살게 될 거야.

이번 열쇠에서 희망이 느껴져!"

그 희망 때문인지 머리 밑이 아니라 온 몸이 따뜻해졌다.

"그래. 부모님도 최선을 다하고 계시니까 너도 열심히 살아. 너에겐 기회가 있잖아."


감시자는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보여주었다.

'마지막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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