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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갑수 Sep 29. 2021

시간의 문법 6

단편 소설

-꿈자리가 사나우니 조심해.


내가 사직 권고를 받은 날 아침에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출근했다.


출근카드를 긁자 팀장이 도면을 건넸다. 나는 도면을 보면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광학펜과 함수전용 계산기, 제도기 세트를 꺼내 순서대로 정리한 후에 일을 시작했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미음 모양이 세 번이나 나왔다. 나는 도면을 다시 확인했다. 무슨 정부 기관 건물의 설계도였다. 파이프가 무슨 용도인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설계팀에 전화를 걸어 알아보려다가 그만뒀다. 내 역할은 설계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도면에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도면을 넘겨보니 반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는 나머지 분량에는 미음 모양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파일을 저장했다. 점심시간에는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지게 되어 있었다. 사장은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는데, 젊어서 많이 굶고 자랐는지 밥을 제때 먹자가 생활신조였다.


-어제 점심이 뭐였지?


국을 먹다가 나는 동료들에게 그렇게 물었다.


-순두부 백반이었잖아요.

-김치찌개.

-아냐. 미역국이었잖아.


의견이 분분했다. 나는 식기를 반납하고 먼저 사무실로 올라왔다. 휴게실에 가서 커피를 뽑은 후에 담배를 피웠다.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광학펜을 들고 다시 파이프를 그리려는데, 방금 저장한 파일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봤다. 도면이 모두 비슷해서 어떤 게 방금 작업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파일을 수정한 날짜별로 정돈한 후에야 찾을 수 있었다.


부장이 나를 쳐다봤기 때문에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오전보다 속도가 많이 떨어졌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같은 부분을 두 번 반복해서 그리기도 했고 파이프가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세상에 혈관이 너무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파이프는 과대평가 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의 혈관이 아니라, 건물의 식도와 항문일 뿐이었다. 지겨웠다. 정말로 그랬다.


겨우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을 하려는데, 부장이 나를 불렀다. 부장의 이야기는 ‘요즘 회사가 어려워’로 시작해서 ‘더 좋은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야’로 끝났다.


-아! 식상해.


나는 그렇게 말했다.


권고를 받아들여 사직을 하면, 퇴직금과 함께 6개월 치 월급을 더 주겠다고 했고, 나는 알았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사직서를 냈다. 사직서는 미음 모양이었다. 부장은 괜찮은 회사를 몇 군데 소개를 해주겠다고 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부장은 특별히 인수인계는 필요 없다고 했고, 나는 그럴 거라고 했다. 나는 개인 사물은 나중에 찾아가겠다고 했고, 부장은 그러라고 했다.


6년을 일한 회사를 그만두는 과정치고는 싱거웠다. 의외로 담담했다. 사실 내가 사장이라도 나를 자르고 신입사원이나 파견업체 직원을 썼을 것이다. 내 업무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파견업체 직원이나 신입사원에 비해 나는 호봉이 쌓여서 더 많은 월급을 받았다. 대리를 달면, 연봉이 더 올라갈 예정이었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영리단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나를 자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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