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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Kim Oct 24. 2021

36살, 교생실습부터 임용시험을 위한 도장깨기

만삭 임신부의 남들보다 더딘 담판 공부법

둘째를 낳고 몸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교생실습을 나갔다. 당시 36살이었다. 10명의 교생들 중 단연 최고령이었다. 평균 띠동갑 아래였다. 무엇이든 나이가 많고 늦게 시작한다는 건 그 자체로 굉장한 애석함이다. 뭘 하든 죄인 같고 뭘 하든 짠하다. 이런 인식 속에 포함되고 싶지가 않았다. 내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신체적 나이가 아니라 정신적 나이로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스스로 당당해야 했다.


둘째 출산 후 교생실습을 나갔던 36살의 봄. 처음으로 학교라는 곳에 갔다. 고등학생들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동기들이 핫플레이스로 놀러 갈 때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집에서 엄마를 기다릴 어린 아기들을 생각하면 10분도 내 시간으로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엄마를 기다리느라 지친 아기들을 안아주어야 했다. 내가 먹고 쉬는 데 돈과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었다. 나를 위한 모든 시간은 낭비였다.


낮에는 아기들을 키우고 살림을 했고, 오후부터 밤까지는 아이 돌보미에게 아기들을 맡기고 대학원을 다녔다. 아기들이 눈에 밟혀 매일 죄책감이 들었다. 매일 포기하고 싶었다.


하늘처럼 파란 151번 버스의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았다. 달리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기도 하고 죄책감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


숙대 앞 정류장에 내리면 그때부터 나는 예전의 내가 되었다.

공부하기 좋아하고 웃음 많고 트렌드를 좋아했던 나로.

 




임용시험 합격자들의 수기를 보면 저마다의 공부 방법이 있었다. 나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굳이 정의해 보자면 이 정도였다. 아기를 키우며 틈날 때만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금보다 귀했다. 학창 시절에는 공상을 좋아해서 5시간 책상에 앉아 있으면 머리에 들어가는 공부는 2시간 남짓이었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5시간이 주어지면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5시간을 온전히 담판 짓듯 공부했다. 게다가 나는 잠이 정말 많다. 안 깨우면 15시간도 잔다. 일이 책상 위의 투쟁이었다.



1. 공부 시작 전: 이미지 트레이닝 - 여기는 실전 시험장이다. 감독관이 들어왔고 시험 시작종이 울린다. 모두들 미친 듯이 답안을 쓰고 있다. (매우 구체적으로 상상을 했다.)

2. 공부 과정: 나에게 설명하기 - 내 언어로 나에게 설명하면, 내 뇌가 한 번 더 듣게 된다. 중 공부가 된다.

3. 공부 틈새: 가짜 독서 경계하기 - 눈으로는 읽고 있지만 머리가 멍해질 때의 찰나를 극도로 경계했다.

메타인지, 인지부조화 알기 -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를 알아야 한다. 모르는 건 최고의 기회다.

4. 공부 종료: 백지 쓰기 - 눈으로 하는 공부는 내 것이 아니다. 백지 위에 쓸 수 있을 때만 내 것이다.

5. 잠들기 직전: 망각곡선 이용하기 - 망각곡선이 상승할 때 기억을 상기시킬 키워드를 다시 되뇐다.



[주간 공부 계획표]  한 시간 단위로 짱짱한 계획을 세우고 매일 소감을 썼다. 몸 회복 전이라 초반에는 정상 수면을 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아침에 등교하면 칠판에 선생님이 내신 자습 문제가 쓰여있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발표를 시켰고 내 목소리가 작아 선생님이 칠판에 써보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내 칠판 글씨를 칭찬하셨고 그때부터 칠판에 매일 자습을 내게 됐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선생님들에게 전해져 졸업하기 전까지 6년 동안 칠판에 자습을 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도 모르게 공부방법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 친구들에게 질문할 학습 내용을 선별하고 친구들이 고민할 여지를 문제에 녹여내는 것, 오답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그리고 제일 중요한 핵심은 이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려면 그날 배운 내용이 완전히 내 것이 되었을 때 가능했을 것이다. 공부하는 것의 참재미를 그 과정에서부터 즐겼던 것 같다. 집에 돌아오면 바쁜 엄마를 쫓아다니며 내가 공부한 것을 이야기 했다. 그 과정도 공부였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주번에게 칠판 지우는 일을 달라고 했다. 모든 수업이 끝날 때마다 내가 칠판을 지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수업 종료 종이 치고 바로 책을 덮고 놀면 직전의 수업시간에 배웠던 내용의 절반만 머릿속에 남게 된다. 집에 가서 책을 펼치기까지 또 그 절반이 날아간다. 다음 날이 되어서는 어제 수업 때 50분 간 들었던 내용을 또다시 50분을 들여야 내 것이 되었다.



그러다 신기한 걸 발견하게 됐다. 수업 종료 직후 칠판을 지우는 일은 작은 기적과도 같았다. 지금처럼 멀티미디어가 교실에 들어오기 전의 아날로그 시대라 선생님들은 한 시간 내용을 칠판 가득 빼곡히 판서했다. 칠판을 줄줄이 지우면서 선생님의 판서를 읽어나갔다. 직전에 들었던 수업 내용이라 50분 분량이 5분 만에 외워졌다. 칠판을 지우는 그 짧은 5분은 다음날의 50분의 공부보다 더 깊게 머릿속에 새겨졌다. 다음 날 한 시간 걸릴 공부는 수업 직후의 5분과 맞먹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것이 망각곡선을 활용한 공부방법이었다.



이 다섯 가지의 공부 방법이랄 것도 없는 공부법은 내가 매년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꼭 학습 코칭하는 내용이다. 당연히 아이들은 안 듣는다. 하지만 게 중에 눈빛이 달라지는 아이들이 반드시 있다. 17살의 나처럼 그것을 따라 하는 지금의 내가 매년 우리 반에 등장한다.




영어시험과 졸업시험, 석사학위 논문을 모두 통과했고, 마지막 과정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이 남았다. 3급 합격이면 임용시험 응시가 가능했지만 기왕 하는 공부라 1급 시험을 봤다. 하나씩 하나씩 도장깨기 하듯 지워나갔다.



EBS 무료 인터넷 강의에서 큰별 최태성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고 완강 후 수강후기를 썼다.

"선생님의 수업은 감동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꼭 한 번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위한 한눈보기 연표 필기


후기를 저렇게 남긴 다음 해, 신규교사였을 때 필리핀 세부 바닷가의 아름다운 비치 바에서 최태성 선생님과 진짜로 딱 마주쳤다. 어찌나 반갑고 신기하던지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인사를 청했다. 큰별샘은 흔쾌히 인사를 받아주었고 내 합격을 축하해 주셨다. 아직도 신기하고 재미있는 추억이다.



꿈을 그렸으면 감추어서는 안 된다.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야 한다. 그럼 현실이 된다.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으니 최소한 내가 뱉은 말이 부끄럽지 않게 몸이 게을러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다닐 때는 만삭의 몸이었다. 대학원 중앙도서관 지하에는 20대 초반의 어린 대학생들이 고군분투하는 고요하고도 살벌한 전쟁터였다. 학생들은 24시간 도서관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들 틈에서 배가 남산만 한 아줌마가 임용시험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대학원을 다니는 3년의 시간 동안 이미 성취의 기쁨을 얻었다. 교사가 되지 않아도 되었다.

뉴스에는 고군분투해도 합격 확률이 낮은 임용 수험생들의 기사가 심심찮게 나왔다. 저렇게 공부에 미친 사람들도 똑똑 떨어지는 시험인데 아이 둘을 키우며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떤 합격수기를 읽게 되었고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대학원 마지막 논문 학기에

본격적으로 임용시험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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