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의 패션, 구두 디자이너 생활을 마감하고 첫째 아기 육아 우울증으로 매일이 감옥 같던 시절에 언니와 통화를 하다가 교사라는 목표가 생겼다. 언니의 후배가 음악교사로 34살에 합격했다는 것을 듣고 그때 처음 알았다. 교사 시험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는 걸. 회사만 계속 다녔으니 나이 제한은 어디든 있는 줄 알았다.
당장 교육대학원 진학에 대해 알아봤다. 모두가 말렸다. 지금 이 나이에, 대학 입시 때 이후로 공부를 해본 적도 없는 굳은 머리의 애 엄마가 교사가 되겠다고 하니 다들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며 뜯어말렸다. 차라리 아기를 맡기고 회사를 가라는 말들만 있었다. 게다가 나는 사범대학교가 아닌 일반대학교를 졸업했고 교직을 이수한 적도 없어서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교육대학원에 입학해 교원자격증부터 취득해야 했다.
서울의 여러 대학에 문의 글을 남겼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의상디자인학과 전공은 생활과학대학의 가정교육 전공으로 지원하라'는 내용이었다. 가정교육이라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의 대학 성적증명서에는 미술, 디자인 전공 이수가 충분히 들어있었다. 그런데도 그것과 관계없이 '의상디자인학과'만 특수적으로 '가정교육 전공'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나는 분명 디자인 전공자였다.
여러 대학들 중 답변이 가장 모호했던 숙명여자대학교 미술교육학과 사무실에 무작정 찾아갔다. 한 여름 아기를 안고 세 번째로 방문한 지 일주일 만에 답변을 받았다.
'미술교육전공으로 입학시험 원서 접수가 가능합니다.'
의상디자인학 전공자를 가정교육학과가 아닌 미술교육에서 입학 원서를 받게 된 첫 사례라고 했다. 그때 미술대학 회의에서 안건을 내주신 분이 나의 평생의 은인이신 지도교수님이다.
서류전형을 접수할 수 있어서 일단 안도했지만 구술시험 외에도 서양화 작품 10점이 담긴 사진 포트폴리오를 제출해야 했다. 바로 다음 날 화실을 등록했다. 내 평생 다시는 안 오게 될 줄 알았고 지나가는 경로라도 밟고 싶지 않았던 홍대 앞 미술학원 거리를, 이번에는 대학원 입시를 위해 14년 만에 다시 오게 됐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미술학원을 처음 가던 날, 인생은 정말 모를 일이다. 여길 다시 오게 되다니.
유화나 아크릴 물감은 고사하고 수채화 물감도 써본 적이 없었다. 내가 자유자재로 다루는 재료는 포스터컬러와 마카, 색연필뿐이었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본 적도 없었다. 수강생들은 거의 서양화 전공자들이었기 때문에 유화물감을 슥슥 잘만 사용했다. 미술학원은 고등학교 때처럼 강사가 가르쳐 주는 곳이 아닌 개인 작업을 하기 위한 작업실이었다. 아기를 두고 새롭게 도전하는 일 자체로 흥분됐고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 더없이 행복했다.
그것도 잠시, 독한 물감 냄새에 자꾸 쓰러졌고 결국은 병원으로 실려갔다. 임신과 출산으로 2년 간 육아 우울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 이제 겨우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병원에서 알게 된 사실은 절망적이었다.
둘째 임신 6주 차.
주민센터에 가서 아이돌보미 신청을 했다.
아이돌보미는 정말로 아이만 돌본다.
아이돌보미의 점심, 저녁, 간식 세 끼를 차려놓고 나가야 했다. 내 아기를 봐주시는 분이니 식사가 조금이라도 성의가 없거나 허술하면 아기가 밉보일까 봐 매일 장을 봐서 국을 끓였고 반찬을 만들었다. 집에 돌아오면 설거지거리와 집안 정리, 빨래가 산더미처럼 넘쳐났다.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피로도를 그때 절감했다.
첫째 아기를 낳고 체력이 떨어졌고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새로운 일을 해보나 싶었는데 둘째 임신이라니. 이 시작을 앞두고 과연 이것이 옳은 결정일까 하루에도 수십 번을 고민했고 매일 포기했다.
아이의 어린이집 소풍 도시락과 아이돌보미를 위한 매일의 식사
어차피 내가 지원할 수 있는 학교는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이 유일했다. 전략적일 필요가 있었다. 여대이므로 포트폴리오 키워드를 '여성의 신념'으로 정하고 그에 대한 작품을 그렸다. 그건 당시의 내 마음의 표상이었고 투영이기도 했다. 마더 테레사 수녀, 김연아 선수, 허난설헌, 가브리엘 샤넬, 버지니아 울프, 명성황후 등 10인의 여성을 작품에 담았다.
포트폴리오 중 가브리엘 샤넬 (<좌> 종이에 펜화 / <우> 캔버스에 아크릴릭)
구술시험을 합격하고 마지막 면접 날이었다.
남성 교수님이 질문했다.
"기혼이시네요? 논문 학기까지 갈 수 있겠어요? 첫째가 두 살이면 곧 둘째가 생길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기혼 여성들은 석사로 뽑아 놓으면 중도 포기를 많이 해요. 그럼 다른 학생이 합격할 수 있는 한 자리가 없어지는 게 되는 건데......"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교수님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공부를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대답을 했다. 차마 뱃속에 둘째 아기가 있다는 내색은 절대 할 수 없었다.
미술교육 전공으로 지원할 수 있게 기회를 열어주신 교수님이 내 대답을 얼른 이어받아 긍정적인 질문을 해주셨다. (교수님은 내가 숙대 24시간 지하 열람실에서 공부할 때 자주 간식을 전해주셨다. 내 공부가 방해될까봐 도서관 입구의 관리센터에 살짝 맡겨두고 가신 적도 많았다. 공부하는 동안 큰 힘을 주신은인이다.)
오랜만의 면접 자리에서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합격자 발표날까지 3주 간 심장을 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