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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치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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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y 25. 2024

마른 콩 속에 숨어있는

콩알 몇 개에 얹었던 마음




언젠가, 쌀에 앉힐 콩을 한 봉지 샀어.

통에 담아 보관하려고 봉지를 뜯다가 그만 식탁 위로 좌르르 쏟아버렸네.

마침 나른하게 누워있던 봄햇살이 파들짝 놀라며 일어서고

순간, 나는 엉뚱한 생각을 했지.


어찌나 잘 말랐는지 일 년 내내 방치해도 상하지 않을 마른 콩 속에

아직 생명이 숨어있다는 걸 짐작이나 했겠어?

그런데 뭘 믿고 그랬나 몰라.

여러 종류가 섞인 콩 봉지에서 골고루 하나씩 골라내서

하루쯤 물에 불렸다가 뒤란의 빈 땅에 묻었는데

거짓말처럼 신화처럼 전설처럼

어릴 적 부르던 놀이의 음률처럼

싹이나서 잎이되고 꽃이피어 워야워야워~! 콩이 열리더라고.

(쓰다 보니 이건 '감자'꺼구나..)


꽃보다 예쁜 콩잎과

야무진 덩굴손과

묵묵하게 감아 올라가던 줄기와

통통하게 영근 콩꼬투리에 대해선

차라리 말을 아끼고 싶네.

그 조곤조곤한 울림을

내가 무슨 수로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어서.


비어있을 게 분명해서

까보고 싶지 않은 내 삶의 꼬투리조차

덩달아 잠깐

허술한 희망으로 웃더라.


그땐 몰랐는데

요렇게 예쁜 콩잎을 깻잎처럼 먹을 수도 있다고 해.

난 그렇더라.

아무리 아름답고 귀한 꽃이나 식물도

소박한 밥상에 오르는 풋것만큼 다정하고 매력적이진 않아.

너무 동물적이라고 흉봐도 할 수 없지만

저 예쁜 콩잎을 오물오물 먹어보지 못하고 거둬버린 걸 후회했지.


그러다 십 년쯤 지난 후에 알아버렸네.

콩잎장아찌는 내가 넘볼 수준의 맛이 아니란 걸.

남도의 정 많은 낯선 이가

자신의 도시락 반찬에서 덜어 준

잘 삭힌 그 얇은 콩잎 한 장을

민망하게도 쉽게 삼키지 못했어.

더럭,

내 삶의 여기저기에 숨어있을 한계치를 떠올렸지.


콩을 넣고 밥을 하거나

호기심으로 날콩을 몇 알 심어

새싹과 줄기와 이파리와 꽃과 꼬투리를 보며 호들갑을 떨고

해맑은 꼬투리를 꼬셔 콩을 얻어 다시 콩밥을 하는,

딱 거기까지가 나인거지.

어쩌면 나는 늘 욕심 없다 말하면서도

속으론 조금만 더, 덤을 원했던 건 아닐까?

새삼 내가 의심스럽더라.


내 한계치를 무시하면

욕심이 되고

욕심이 무너지면

고통이 된다는

낡디 낡은 자각을 놓치면

어김없이 그 자리로 밀려드는

등이 말린 부끄러움,


여태도

등이

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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