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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Aug 06. 2024

블루베리 먹을 때, 생각나는

Blueberry U-Pick _ Maple Ridge, BC



매년 팔월이면 잊고 있었던 곳으로부터 이메일을 한 통 받습니다. 일 년에 딱 한 번 가지만 단골이라 불리는 어느 블루베리 농장에서 온 - 블루베리가 잘 익어서 유픽(U-Pick) 할 시기이니 올해도 꼭 오라는- 메일입니다. 여름이 깊어져 다시,


블루베리 익어가는 계절입니다.


하지만 이젠 농장을 찾아가진 않습니다. 블루베리 유픽을 가지 않은 게 언제부터였는지 확실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블루베리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서 살게 되면서부터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라면, 다른 경로로 블루베리를 구입하게 되어서입니다. 직장 동료인 A는 어느 날 유산으로 블루베리 농장을 물려받았는데 처분하지 않고 계속 유지하면서 동료들에게 주문을 받아서 박스 포장으로 팔았습니다. 맛도 괜찮았고 시중보다 싸기도 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애용했습니다.




이젠 블루베리 계절이 되면 유픽을 가는 대신 마트에서 산 잘 익은 블루베리를 오물오물 먹으면서 지금쯤 그 농장에도 블루베리가 한창이겠구나, 옛 기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이래서 사소한 것일지라도 경험이 중요한 거란 생각도 합니다. 마트에서 똑같은 통에 담겨있는 같은 빛깔의 블루베리를 한 통 사다 집에서 먹으면서도 유픽하면서 만났던 튼실한 블루베리 나무들과 열매가 익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던 그 각각의 빛깔들이 떠올라, 어쩌면 지금 내가 느끼는 맛은 유픽을 해보지 않은 사람의 블루베리 맛과는 조금쯤 다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누군가의 숨은 내력을 알고 나면 그 사람에게 더 정이 가고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잘 익은 블루베리 한 알을 입에 넣으면서 햇살과 바람의 관심을 받아 점점 더 짙은 보랏빛으로 익어갔을 고 작고 어린, 뽀얀 연두 한 알부터 떠올리는 거죠. 포근하고 달큰한 맛을 만들려고 어린 연두는 또 얼마나 조잘조잘 분주했을까요.



우리가 일 년에 한 번씩 찾아가던 블루베리 농장이 있는 곳은 근접해 있는 도시인 '메이플 릿지Maple Ridge'의 한 마을이었는데 그리 먼 교외가 아니면서도 시골 분위기가 가득한 곳입니다. 밭농사를 짓는 농가와 함께 블루베리 농장도 여러 개가 있는데, 드라이브를 하다가 사전 정보도 없이 그야말로 '감'으로 찾아 들어간 곳이 운 좋게도 친절하고 열매도 맛있어서 매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맨 처음 눈에 띈 나무에서 블루베리를 따기 시작했을 때, 나무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니까 따기 전에 미리 맛을 보고 따라면서 사실 이 나무의 열매는 조금 신 편이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맛있는 블루베리를 딸 수 있으니 따라오라던 주인아저씨의 마음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유픽(U-Pick)은 농장에 가서 직접 열매를 따고 나중에 무게를 달아서 계산을 하는 방식인데 따는 동안 먹는 것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플라스틱 통을 하나씩 들고 각자 흩어져서 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집중을 하게 되어서 흡사 나홀로 무언수행을 하는 것 같아 나름 좋은 시간이다싶다가도 아이들에겐 좀 미안해서 괜히 큰 소리로 부르며 위치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통에는 목에 걸 수 있는 끈이 매달려 있어서 그걸 목에 걸면 좀 더 전문가다워 보인다는 주인아저씨의 농담에 웃으면서도 아이들과 저는 절대로 목에 걸진 않았지요. 아무래도 좀 우스워보일 것 같다는 아이들의 말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건, '우리는 지금 절대로 즐기고 있는 게 아니라'는 소심한 반항이기도 했습니다. 우스워보이면 재밌어지기가 쉽잖아요. 거름막 없이 맑게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저게도 즐거움은 약간일 뿐, 그저 노동이었지만 워낙 블루베리를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 아이들과 제가 희생(?) 한 것이거든요.


싫어도 묵묵하게 블루베리를 따는 큰 아이와는 달리 작은 아이는 애교나 떨며 요리조리 놀러만 다니더니 할당된 통의 반도 못 채우고서도 아동학대나 노동력 착취로 신고할까 생각 중이라고 해서 우리 모두를 한바탕 웃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고맙게도 신고도 안 하고 매년 같이 오긴 했어요.ㅎ 당연히 잘 익은 것을 고르느라 수많은 블루베리를 눈으로 뒤지지만 블루베리가 익어가는 과정의 색감 변화를 너무 예뻐서 저는 사진을 찍으며, 덜 익어서 딸 수 없는 것들에도 감탄합니다.




첫 블루베리 유픽에서 네 식구가 딴 블루베리는 총 26파운드로 꽤 많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맑은 물로 두세 번 헹군 후에 큰 야채통에 나눠 담아서 냉동고에 차곡차곡 넣고 나니 꼭 김장을 한 기분이었습니다. 좀 힘들긴 했지만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수확한 블루베리는, 냉동실에서 알알이 코팅되듯 얼어서 여름엔 우유를 부으면 금세 셔베트가 되어 더위를 식혀주고, 빵이나 팬케익을 구울 때도 넣고, 콩포트를 조금 만들거나 요거트나 샐러드에도 넣어 먹습니다. 그리고 땡글땡글 언 블루베리를 마치 팝콘이나 땅콩을 집어먹듯 한 알씩 먹는 재미도 있지요. 그렇게 남은 여름과 겨울까지도 늘 식탁엔 블루베리가 올랐습니다.


지난주에 마트에서 블루베리를 한 통을 샀습니다. 크고 실한 열매를 골라 딸 수 있는 유픽에 비하면 좀 부실했지만 그래도 맛은 좋았어요. 한 움큼 덜어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것을 꺼내 오랜만에 셔베트를 만듭니다. 냉동실에서 땡땡하게 언 블루베리를 담은 그릇에 우유를 붓고 잠깐 두었다가 스푼으로 살살 뒤집어주면 맛있고 시원한 블루베리 셔베트가 됩니다. 한 입만 먹어도 여름의 열기가 쏙 들어가지요.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건 추억이 쌓였다는 것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때 그랬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 것들의 갈피에는 변화와 성장의 흔적들이 압화처럼 끼워져 있습니다. 식구마다 블루베리를 좋아하는 정도나 먹는 방식은 다르지만 함께 경험한 사소한 기억으로 인해 가끔은 서로에게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이제 다시,

블루베리 익어가는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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