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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Aug 12. 2024

꽃물

Noons Creek Drive, Port Moody



오래전 일이다. 한국에 다녀온 지인이 마치 붓대에 감췄던 문익점의 목화씨를 꺼내는 표정으로 작은 봉숭아꽃씨 봉투를 내밀었을 때, 평소에도 선물에 대한 센스가 남달랐던 그녀가 새삼 다시 감탄스러웠다. 그 순간, 그동안 내가 봉숭아꽃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꽃씨를 뒤란의 빈 땅에 마치 화룡점정하는 기분으로 한 알 한 알 심고, 물을 주며 여름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은 자주 유년의 마당으로 달아났다.



부엌 찬장의 작은 서랍을 열면, 다른 물건을 찾느라고 이리저리 치이며 낡아가는 작은 상자갑이 하나 있었다. 위에는 큰 글씨로 '명반'이라고 쓰여있었다. 그 글자가 눈에 띌 때마다 내 손톱을 흘깃 보며 여름날의 그 꽃을 떠올렸을 것이다. 할머니의 꽃밭 앞자리, 채송화 바로 뒤에서 여름 내내, 나비의 날개짓처럼 훨훨 피어나던 봉숭아꽃. 봉선화라는 다른 이름을 알고 난 후에도 여전히 내 유년의 언어인 '봉숭아'라고 불러야 마음이 흡족했다.


할머니께서는 여름마다 동생과 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여주셨다. 아니,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건 서너 번 밖에 안된다. 어른이 된 후에도 맨손톱이 좋아서  매니큐어를 산 적도 없고, 옷이나 장신구가 몸을 구속하는 걸 견디기 힘들어하는 성향으로 보면 어릴 때도 봉숭아 꽃물을 들이는 과정을 싫어했을 게 분명하니 어쩌면 꽃물을 들인 건 내 기억 속에 있는 횟수가 전부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유년의 여름과 봉숭아꽃물은 마치 환상의 짝꿍처럼 해마다 되풀이한 여름 놀이로 각인되어 있다. 그래선지 아직까지도 누군가의 손톱에 남아있는 봉숭아꽃물의 흔적을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그 사람에 대해 터무니없는 호감을 가진다.


할머니께 붙들려 꽃잎에 이파리와 백반을 조금 섞어, 물에 씻은 깨끗한 돌멩이로 콩콩 찧은 봉숭아를 손톱 위에 조심스레 올리고 이파리나 작게 자른 비닐조각으로 덮고 명주실로 꽁꽁 감고 자던 여름밤, 혹시라도 망가질까 봐 엎드려서 손 등이 위로가게 하고 한껏 팔을 뻗어 잠을 청해도, 아침에 잠이 깨서 자세가 바뀐 걸 알아채면 화들짝 놀라서 손톱부터 살폈다. 대개는 한 두 개쯤은 빠져나가 방바닥이나 요 위에서 뒹굴고 있었지만 어느 결에 발그레한 꽃물을 내 손톱 위에 남겨놓은 후였다.





사실 나는 꽃보다도 건들면 톡 터지며 영근 씨앗을 내놓고 또르르 말리는 꼬투리를 더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분꽃도 그렇고 꽃보다 씨앗을 받는 걸 더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흘러 이 먼 곳까지 와서 꽃을 피우는 내 화단의 봉숭아꽃은 너무 예뻤다. 색깔도 내 기억 속의 주홍빛보다 더 맑고 화려했다. 볼 때마다 꽃빛이 반사된 듯 내 얼굴도 덩달아 환해졌다.




우리 집 화단에 봉숭아가 있다는 걸 알고 부러워하는 이웃에게 꽃 피기 전의 어린 모종을 두 그루 나눠주면서 잘 키우란 소리를 세 번이나 했다. 누가 봤으면 산삼 뿌리라도 나눠주는 줄 알았을 것이다.




봄꽃들이 지고 나니 온통 초록밖에 없는 우리 집 마당에서 정말 어릴 적 부르던 노랫말처럼 ㅡ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ㅡ 꽃 피었다. 예상보다도 너무 잘 자라고 꽃도 많이 피어서 모종을 나눠주며 생색을 내던 일이 새삼 우스웠다.





구월이 되고, 바람까지 업고 온 큰비가 내리던 날, 흐드러지게 피었던 뒤란의 봉숭아꽃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돌단위로 떨어진 꽃잎을 주워 모을까 하다가 그대로 흙 위로 던져놓았다. 찧어서 냉동실에 보관해 두면 언제든 손톱에 꽃물을 들일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것마저도 미뤄 둔 '해야 할 일'이 될까 봐 나는 망설인다. 그러니까 그 여름에 나는, 새로운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한 올도 더할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 내 몸속의 은밀하고 애처로운 한 공간을 덜어낸 후였다. 오랫동안 자주, '화양연화'란 단어가 떠올랐다. 봉숭아, 저 혼자만 신나서 훨훨 피어나던 여름도 끝나가는지 이른 아침엔 벌써 발이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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