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람 Sep 04. 2021

최선의 나를 찾아서

소설 데미안을 읽고,

소설 「데미안」은 싱클레어라는 인물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내면의 혼란 속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에서 혼돈의 시대에 사회에서의 역할 정립으로의 확장이다. 크게 보아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할 것으로 보이나, 그것은 한 개인 내면의 완성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소설은 ‘너 스스로를 알라’라는 막연한 방식이 아니라 실제로 싱클레어의 에피소드에 나를 빗대어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소설을 읽으며 내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모두 동일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버릴 수 없었다. 즉, 모든 인물은 싱클레어의 내면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아인 것이다. 물론 싱클레어가 목격한 실존 인물일 수도 있겠으나 베아트리체처럼 일종의 계기 정도의 역할만 했을 뿐인 것이다. 그렇기에 소설 내내 꽤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만 첨예한 고독이 암역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싱클레어의 자아정립을 향한 혼자만의 쟁투인 것이다.    


싱클레어의 유년시절은 그의 치기로 크로머와의 악연이 시작된다.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과 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크로머와 같이 있다 헤어진 어느날, 데미안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싱클레어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상황을 회피하려는 싱클레어에게 마주할 수 있게끔 끊임없는 질문을 한다. 그런 뒤 어쩐일인지 크로머는 더이상 싱클레어를 괴롭히지 않는다. 두려움의 대상인 크로머를 극복하는 방법은 상황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었다. 우리는 때때로 싱클레어처럼 두려움에 무뎌지고 회피하는 전략만을 쓴다. 그런 우리에게 데미안은 질문을 던진다. “무엇에 두려움을 느끼는가?, 숨기는 것, 비밀이 무엇인가?”. 또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독심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을 충분히 자세히 바라봐. 그러면 그에 대해서 그 자신보다 네가 더 잘 알게 돼”. 무뎌지고 잊혀져 인식조차할 수 없는 두려움을 알고자 한다면, 충분한 자기 관찰, ‘독심술’이 필요한 것이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개방과 비판의 태도로 스스로에게 새겨진 카인의 표적을 찾는 것 말이다.    


이후 데미안과 헤어지고 취한 삶을 살며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그녀의 모습을 그리다 데미안을 떠올렸고, 아프락사스 꿈을 꾼다. 이 대목에서 나는 등장인물 모두가 동일인임을 거의 확신했는데, 그것은 싱클레어가 방탕한 삶을 살고 있을 때마다 데미안과 같은 구도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싱클레어의 아버지나 학교에서는 그를 감화시키려 갖은 노력을 하지만 변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삶 어딘가 잘못 흘러가고 있을 때 결국 구도할 수 있는 것은 본인 자신밖에 없는 것이다. 한 자아는 누구나 스스로의 구도자,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피스토리우스와의 만남은 이 책의 등장인물 중 가장 흥미롭다. 데미안 이후의 싱클레어 멘토가 되지만, 피스토리우스 그 자신은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피스토리우스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침울한 은둔자’의 삶을 살지만, 싱클레어에게 아프락사스를 비롯한 신학, 철학, 음악 등 다양한 지식을 알려준다. 그는 각 개인에게 부여된 운명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는 ‘운명에 자신을 내맡길 만큼’ 용기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싱클레어에게 훌륭한 코치이었을지언정 자신 인생의 훌륭한 플레이어는 아니었던 것이다. 지식은 없고 행동만 있는 자는 어리석고 사유만 있고 행동이 없는 자는 불행한 법이다. 이 대목에서는 싱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를 상징으로 삼아 ‘책’을 통한 다양한 학문에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책을 통한 지식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향한 구도자’이며 ‘골동품’에 그친 것이기 때문이다.


배움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삶, 사회에서의 자기표현, 존중, ‘연대’로의 확장이 그 다음 후반부 줄거리를 구성한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카인의 표적’이 새겨진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그것을 행하려고 하는 자이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반짝반짝하고, 특별한 아우라를 풍긴다. 때때로 그 모습이 표적이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너무나 큰 이질감을 느끼게 만들어 ‘무서움과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데미안처럼 그 속에 어울리려고 노력하지만, 싱클레어처럼 고독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연대’라는 것은 큰 위로를 준다. 책의 마지막 부분인 ‘종말의 시작’은 그런 연대를 통한 새로운 시대로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책이 1차 세계대전 때 쓰여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연대가 맞이할 새로운 세계로의 알을 깸은 개인의 것보다 더욱 거대한 것임을 상징하는 것 같다. 새의 입장에서보면 혁명과 새로움이지만 알의 처지에서보면 죽음과 종말이기 때문이다. 결국 싱클레어가 유년시절 인식한 것처럼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보이지만, 선과 악은 공존하고 탄생과 죽음은 불가분적인 것이다.     


이 소설은 비유와 상징이 많아 흡입력 있는 독서가 어려웠지만, 그만큼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 감동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초반부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중반부 피스토리우스 어딘가에서 멈추었다. 내가 후반부에 내 인생을 비추어보지 못하는 것은 경험의 부족, 특히 공동체 기여에 대한 부분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내가 그만한 연대를 경험하고 사유가 쌓여, 이 책을 완전히 내 인생에 빗대어 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