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계적 배움에 대한 갈증에 관하
개발자로서 나는 비전공자다.
관련 과목을 몇 개 들었으니 ‘반전공자’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전공이라는 견고한 울타리 밖에서 스스로 길을 낸 독학자다.
울타리 밖에서 공부하다 보면 묘한 감정이 불쑥 찾아오곤 한다.
분명 나는 프로그램을 짤 줄 알고 결과물도 만들어내는데, 내 안의 지식이 마치 파편처럼 흩어져 있어 체계가 빠져 있다는 불안함이다.
회사를 다니며 성과를 내고 동료들보다 앞서 나가는 순간에도 그 찝찝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갈증이라기보다, 마음 한구석에 깊게 뿌리내린 자격지심에 가까웠다.
내가 처음 집어 든 개발 서적은 C++ 책이었다.
앞부분은 술술 읽히더니 포인터가 등장하면서부터 문장들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끝까지 읽었다.
모르는 내용은 모르는 대로 두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당시 나에게는 컴퓨터조차 없었다.
그저 종이 위에 인쇄된 글자들을 머릿속으로 옮겨 심는 수밖에 없었다.
같은 책을 다시 읽었다.
조금 더 이해됐지만, 여전히 막히는 곳에서 또 멈췄다.
그래도 다시 끝까지 읽었다.
세 번째 읽을 때 비로소 구조가 보였고,
그때 다른 C++ 책을 한 권 더 샀다.
같은 개념을 다르게 설명하는 문장들을 대조해 보며 비어 있던 퍼즐을 맞췄다.
세 권의 C++ 책을 각각 다섯 번씩 반복해서 읽고 나서야
C++이라는 언어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처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Turbo C로 코드를 짰을 때,
신기하게도 막히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머릿속으로 수만 번 반복했던 시뮬레이션이
손가락을 통해 현실이 되었을 뿐이었다.
현업에 뛰어들어 STL을 처음 접했을 때나,
게임 개발의 표준이었던 Watcom C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읽은 어떤 책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느꼈던 갈증의 정체는 실력의 부족이 아니라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였다는 것을.
그리고 많은 조직은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채 사람을 평가한다.
Windows Internals를 뒤지고,
덤프 파일을 분석하고,
시스템 해킹 서적을 탐독하며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대학 커리큘럼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을
나는 이미 현장에서, 그리고 닥치는 대로 읽은 책들 속에서
스스로 체득해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전공자만을 우대하는 채용 정책은 나쁜 것이 아니다.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인재를 확보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70점짜리 정책’이라 부른다.
리스크는 줄여주지만,
정해진 틀 밖에서 자라난 특출 난 인재를 발견할 수는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마치 양반의 정실 자손만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던 조선시대의 제도처럼,
범위를 제한하면 그 밖의 인재들은 보이지 않게 된다.
다행히 개발의 세계,
특히 내가 몸담았던 게임 분야는
실전이 곧 증명이 되는 열린 곳이었다.
이 ‘열려 있음’이야말로
우리 업계가 가진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비전공자라는 사실이
내 손에서 키보드를 내려놓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독학자에게 체계란
누군가 차려주는 밥상이 아니다.
스스로 재료를 찾아 헤매고,
직접 조리하며 만들어 가야 하는 외로운 과정이다.
그래서 독학자는 언제나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쪽에 서게 된다.
확신이 흔들린다면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은 방향이 틀렸다는 신호가 아니라,
당신의 경계가 확장되고 있다는 증거다.
나 역시 지금도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알려고 애쓰지 않고,
내 손이 닿는 영역부터 하나씩 넓혀 갈 뿐이다.
전문가란 어디에서 배웠느냐로 결정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코드와 결과물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 질 수 있느냐로 결정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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