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방콕
교회 수련회가 끝나고 다시 수쿰빗 거리로 나왔다. 여느 때와 같이 화창한 날씨에 활기가 넘치는 도심지 었지만 그날은 어딘가 더 한 껏 들뜬 분위기였다. 건너편 길가에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썽태우에 물을 신나게 뿌려댔다. 간간히 얼굴에는 흰 반죽을 묻힌 사람들이 각종 물총을 들고 지나갔고, 몇몇은 이미 전쟁을 치른 듯 축축이 젖어있었다. 나는 혹여 물세례를 맞을까 가방에 방수커버를 씌웠고 어느 때보다 독특한 행색의 사람들로 빽빽이 들어찬 지하철에 몸을 욱여넣었다.
미 이모가 있는 호스텔을 다시 찾은 것은 거의 2주 만이었다. 이모는 또 다른 푸근한 인상의 직원과 함께 사무실에서 나를 반겼다. 마치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그간 동남부 여행이 어땠는지 미주알고주알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모와 나 둘 다 언어가 그렇지 못했다. 대신에 나는 짠타부리에서 캔 보석을 이모에게 선물했다. 이모는 기뻐하며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물총부터 시작해 보호안경, 방수팩, 그리고 꽃목걸이까지. 송크란 축제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이모는 이 모든 걸 내가 여행하는 동안 부지런히 사모은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축제 거리로 뛰어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간 바쁜 여정에 치여 체력이 고갈난 상태였다. 나는 반나절을 침대에 그저 누워있었고 눈을 떠보니 해가 진 후였다. 다들 나간 방에 우두커니 앉아있자니 마음 한편에 조바심 같은 게 밀려왔다. 사실 수련회가 끝나고 청년들은 아유타야로 송크란을 즐기러 갔는데, 나는 피곤하다며 홀로 숙소에 돌아갔었다. 그냥 따라갈 걸 그랬나. 마치 잔치집에 홀로 초상을 치르는 듯한 어둑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분위기라도 살피자고 밤거리로 나왔다. 혹시 몰라 이모가 준 물총에 물도 가득 채웠다. 카오산로드에 가까워질수록 음악 소리가 선명하고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점점 평범한 거리 풍경은 전쟁터 같이 변해갔다. 주차된 차들엔 흰색 반죽, 뺑이 여기저기 발라져 있었다. 한때 한국 아저씨 둘과 한가로이 걷던 카오산 로드 주변 거리는 여기저기 치열하게 물세례를 퍼붓는 싸움터 같이 변해있었다. 처음엔 강 건너 불구경이라고, 사람들이 도로 한복판에 막혀 옴짝달싹 못하는 버스에 달려들어 물총을 쏘아대는데 승객들은 반항도 없이 이를 그대로 맞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한편으론 짠하기도 하다며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내 등에 물총을 쏘기 시작했다.
장난기 어린 여자의 물총 세례에 나도 반격을 가했다. 그렇게 한바탕 치열한 싸움에서 벗어나면 또 누군가 내게 물총을 쏴댔다. 큼지막한 물총으로 두터운 물줄기를 쏴대는데 이에 비해 내 물총은 작고 가녀렸다. 누군가는 내게 장난처럼, 누군가는 진정 나를 축복하듯 물을 뿌렸다. 어느 가게의 아주머니는 내게 양해를 구하곤 물을 조심히 부어주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이 내 얼굴에 부드럽게 뺑을 바르고 지나갔다. 중간에 마주친 어떤 할아버지와는 춤도 추었다. 그렇게 축복 받으며 나는 카오산로드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더 이상 누가 일행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북적이는 행렬에 몸을 맡겼다.
숨 막힌 카오산 로드를 빠져나와 싸남 루앙 공원으로 향할 무렵엔 나는 이미 축축이 젖어 있었고 얼굴은 뺑으로 하얗게 얼룩져 있었다. 나는 한껏 신이 나 길거리 음식을 와구와구 씹으며 계속 걸었다. 공원 축제장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조형물이 조명들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고 한쪽에선 무에타이 경기가 한창이었다. 나는 잠깐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경기를 즐기다가 음악에 이끌려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내 취향에 맞지 않는 EDM이었지만 심장까지 쿵쿵 울려대는 소리에 자리에서 방방 뛰며 물총을 하늘 높이 쏘았다. 불과 몇시간 전까지 방안에서 침체되었던 사람이 맞는가. 혼자였지만 또 함께였던 나의 송크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