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살바도르에서 온 여인
2019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래로 프랑스 파리는 “꽁삐느멍(confinement)”* 아래에 놓이게 되면서, 얼마간 반경 10km 이상 움직이는 것을 금했다. 나는 그 당시 막 어학 비자를 받고, 집을 구하지 못하여 에어비엔비 숙소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곳에 머무르던 대학생과 친해져 같이 마트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하기도 했었다. 에어비앤비 프로필에는 그녀의 얼굴 사진이 등록되어있었으나, 아파트의 실 주인은 따로 있었다. 주인은 그녀에게 잡일을 돕고 숙소 관리를 하는 조건으로 싼 가격에 머무를 수 있도록 했다. 각종 편지 업무부터 아파트 예약 관리, 고양이 돌보기 등을 도맡아 했다.
* 꽁삐느멍은 프랑스 정부가 팬데믹 동안 시행한 이동 제한 조치로, 외출 시에는 이유를 명시한 서류를 지참해야 했고, 일정 거리 이상을 벗어나는 것도 제한되었다.
그 친구는 엘살바도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고, 대학 진학을 위해 프랑스로 넘어온 유학생이었다. 어머니는 판사였고, 아버지는 종적을 알 수 없는, 남미 특유의 자유로운 기질을 가진 가정의 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늘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셨다.
“절대 백인과의 싸움에 말려들지 마라.”
그녀의 어머니는 판사임에도 불구하고, 국적이 늘 발목을 잡았다. 엘살바도르라는 나라는, 내게는 커피 원두의 고장이자 풀숲 사이를 날아다니는 알록달록한 앵무새들이 떠오르는 곳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마약 범죄와 납치 사건이 만연한, 위험하고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국가적인 배경은 그녀에게 심각한 불안 장애를 남겼다. 특히 코로나 발발 이후 그녀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로 바깥 외출조차 어려워다. 집주인은 그녀의 이러한 상태를 단순한 ‘예민함’ 정도로 여겼지만, 나는 그녀의 공포가 그렇게 가볍게 치부되지 않기를 바랐다.
누군가에게는 과한 제스처로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장을 보고 돌아오면 일부러 그녀가 보는 앞에서 손을 깨끗이 씻었다. 마스크 역시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기 전까지는 벗지 않았다. 그녀와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생활했고, 그런 작은 배려들이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집주인의 아들과 그의 여자친구가 당분간 집에 들어와 지내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채 크게 울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있던 물건들을 쓸어내려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의자를 들어 던졌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곁에 앉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도와줄테니 우선, 진정하고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사실 이 집에서의 생활은 하녀나 다름없다고. 숙소 관리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늘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살아가고 있다고. 그리고 집주인의 아들은 spoiled, 지나친 혜택 속에서 자라 인격이 무뎌진 사람이었다고 했다.
“정말 그들이 같이 살게 된다면… 우리 그냥 이 집 나가자. 다른 집을 구해보자. 내가 도와줄게.”
이윽고 집주인의 아들과 여자친구가 도착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들은 새벽까지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벌이기까지 했다. 부엌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고, 음식물 찌꺼기와 설거지하지 않은 그릇들로 뒤엉켜 누군가가 요리할 공간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불안했던 건, 그 여자친구가 계속해서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숙소를 관리하던 그녀는 그 이후로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는 소리가 벽을 넘어 나에게도 고스란히 들려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조금이라도 체류에 문제가 생겨 엘살바도르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오면 위험해질 수 있으니, 일단 그곳에서 버텨보라고 조언했다.
일단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는 아들 커플의 행동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판단하여 숙소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집주인에게 아들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남은 금액에 대한 환불을 요청했지만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그 친구는 같이 그 집을 나와서 다른 자취방을 구해 살자는 나의 제안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새로 이사한 곳은 몽마르뜨 언덕에 위치한 조용한 아파트였다. 관광객이 빠져나간 덕에 창 밖으로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볼 수 있는 좋은 뷰가 펼쳐졌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듯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 살바도르 출신의 미대생으로부터, 새아버지의 부고를 알리는 연락이 왔다.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렀다는 소식은 그렇게 처음으로 내게 전해졌다. 코비드 바이러스는 단순한 감염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실로 죽음까지 몰고 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가족이란 존재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 있는, 그러니까, 유학길이 고행이라면 포기하고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차원이 아니였다. 트럼프 당선 이래로 미국의 이민자들에게 주어지는 체류 조건은 날이 갈수록 숨통을 조였다. 엘살바도르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국경을 넘는 일이 아니라, 삶의 모든 기반을 잃는 일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만나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소규모 디자인 회사의 사장이었고, 친구와 함께 동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갑갑한 꽁삐느멍을 견딜 수 없다고 하며, 자신의 아파트에 비치된 피아노에서 마음껏 연습하라고 열쇠를 던져주고는 친구와 함께 포르투갈로 바캉스를 떠났다. 그러나 나는 그 아파트에서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살던 숙소에서 그 아파트까지의 거리가 10km 이상이라, 운 나쁘게 경찰에 걸리면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벌금이 부과되고, 나중에 체류증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이 되었다. 지금이라면 배짱 좋게 갔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무려 6년 전이었고, 내 프랑스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물론, 때때로 법을 어기고 피아노를 연습하러 간 적도 있었다. 사실, 전공자에게 연습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은 행위라, 그것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몽파르나스 근처에 위치한 그의 아파트는 평소에는 매우 북적이고 세련된 곳이었지만, 그때의 그 곳은 마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변해 있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연출된 그 장면과 유사한 광경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전쟁통 속에 홀로 남아 연습할 수 없는 한 대의 피아노를 두고, 텅 빈 세상을 보는 주인공의 시점을 이렇게 상상하고 이입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시 포르투갈은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지 않아 자유롭게 휴양을 즐길 수 있었고, 가을이라 쌀쌀하고 어둑한 프랑스 파리와는 달리 따사로운 햇볕 아래 반팔을 입을 수 있을 만큼 날씨가 좋았다. 그는 그곳에서 풍성한 해산물과 파란 해변을 마음껏 누렸다. 친구의 새아버지 부고 소식과 동시에 도착한 포르투갈발 사진 속 풍경은 너무도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이상하리만치 밀려오는 역한 감정에, 나는 더 이상 그의 연락에 응할 수 없었다.
어느덧 꽁피느멍이 풀리고 폐쇄되었던 공공시설이 모두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문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곧장 성당으로 달려갔다. 이른 오전의 성당내부에 스테인드 글라스 사이로 차가운 햇살이 스며들었다. 아기를 안고있는 성모상은 바질리카*를 수호하며 제단 위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아픈 사람들이 병을 이겨내고, 내 일 역시 잘 풀렸음 하는 마음에 성호를 그었다.
* 바질리카(Basilique)는 교황청이 특별히 지정한 성당에 붙는 칭호로, 몽마르뜨 언덕의 사크레쾨르 대성당 또한 그 중 하나이다.
기도를 마친 뒤 고개를 들고, 조용히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섰을 때—성당 안은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울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여인은, 아이를 품에 안고, 히잡을 쓴 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카톨릭 성당에 온 무슬림 여인의 모습은 지금도 불시에 기억의 표면 위로 떠오르곤 한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집시 에스메랄다*는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으로 향한다. 아름답지만 혼란의 중심인 이 도시에서, 기도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누군가의 상황이, 시대를 관통하며 반복되고 있음을 선명하게 떠올리게 했다.
* 에스메랄다는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에 등장하는 집시다.
그 날, 디자이너에게 연락이 왔다. 꽁삐느멍이 풀렸지만, 언제 다시 이행될지 모르니 포르투갈에 더 머무르겠다고 말이다. 마스크 없이, 웃는 얼굴로, 해변가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