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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학 접기 망각곡선

by 사온

00:09

2025년 7월 31일, 목요일 (GMT+2)

파리 시간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인연이 있어왔다. 나는 그 사람들 모두에게 의미를 부여해가며 실제로 얼마간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오로지 타국에서 만난 사람이 몇마디 나눈 것 만으로 마음이 깊게 통하는 사람이라는 감상에 빠져 언제든지 그 때처럼 마음을 열고 지낼 수 있는 사이로 지내고 싶다는 심정이 컸기 때문이다. 때로는 맹목적으로 선의를 베풀기도 했는데, 여행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어떤 특별한 이벤트를 실행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대중교통 안에서 어린 아이들은 쉽게 보챈다. 사람이 많든 적든 불편하고 갑갑하면 크게 우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의 엄마가 민망해하며 아직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어린 아이임에도 평소보다 좀 더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혼을 내는 모습을 본다. 난 그 떄마다 스케치북을 찢어 하트나 종이학을 접어 아이에게 선물하곤 했다. 그러면 정말 귀신같이 아이가 울음을 그쳤기 때문이다.


친구의 생일파티를 마치고 프라이부르크로 오는 길, 어김없이 아이 한명이 크게 울기 시작했다. 기차 연착이 몇시간 이상 지속되면서 많은 승객들이 얼마 남지 않은 기차에 낑겨타느라 많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서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여행 전 파리 화방에서 산 스케치북을 찢어 종이학을 접기 시작했다. 그런데...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단 한번도 잊은 적 없었던 학을 접는 법을 잊었다는 것을 그 때 알아챘다. 이내 포기하고 하트를 접으려 했는데, 그 방법 마저도 잊고 말았다.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실용적이지 않은 것들과 멀어진 지 오래다. 필요한 언어만을 탑처럼 쌓으며 살아남으려 애썼다. 인문학이라던가, 화분을 가꾼다거나 하는 것들은 가능한 만큼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이다. 독일의 수도가 베를린이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걸 영어로는 ‘벌린’, 독어로는 ‘베얼린’이라 발음하는 차이에서, "벌린"에서 왔다고 하면 잠깐 뇌에서 마비가 오는 것처럼 그 곳이 대체 어디지? 하게된다. 룩셈부르크가 국가이지 벨기에 소속국가가 아니란 것을 분명 알고있음에도, 수도가 어디냐고 묻는다.


수월하게 나올 줄 알았던 독일어는 입에서 맴돌기만 했다. 며칠 지나자 익숙해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때 쯤 여행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갈 시점이 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국경에 있는 도시, 스트라스부르에서 나는 모든 말을 시작할 때에는, 오히려 반대로 프랑스어가 입에 붙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동적으오 je(불어)가 아니라 ich(독일어)부터 뱉어버리게 된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독일에서도, 결국 사람들은 나에게 영어로 말하려 한다. 나는 그들이 던지는 농담에 꽤 자주 이해하지 못한 채 따라 웃는다. 각 문화에서의 농담이 다르고 언어가 전부가 아닌 각자의 돌려말하기 방식에서 혼란이 온다.


오랜만에 만난 독일 친구들이 품위 있게 나누는 대화 속에서 내 편협한 시야와 거친 말에 스스로 부끄러워진다. 그렇게 한때 내가 걸었던 삶의 윤곽이 희미해졌음을 실감한다. 독일어나 프랑스어, 영어 등이 자주 쓰지 않는 이유로 때때로 예측할 수 없는 단순한 표현마저 잊어버리고, 혹은 어느 나라의 수도가 어딘지, 어떻게 발음하는지 잊더라도, 종이학을 접는 것만큼은 잊으면 안되는 일이였다.


휴대폰 블루투스를 연결해 아이패드로 인터넷을 연결한 뒤, 종이학 접는 법을 켰다. 기차에 탄 사람들은 내가 동양인 여자라서 손재주가 아주 좋아 그 자리에서 몇초만에 뚝딱 만들 것을 기대했던 눈치였는데, 종이접기 방법을 검색하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는 조금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어떻게든 만들어 종이학을 완성했다. 그리고, 옆 자리에서 힘들어하던 아기에게 선물했다. 아기는 방글방글 웃었다.


다국적 인종들이 모여 사는 파리에서, 낭만도 좋지만 그 것을 책임지기 위해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에 매달리다보면,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는 계속해서 편협해진다. 중노동을 하면서, 특성상 모일 수 밖에 없는, “싫어도 마주쳐야하는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적응한다. 나와 “마음이 맞는 선별된 친구 그룹”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되뇌이며,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저런 식으로 행동하지 말아야지" 하며 반면교사를 삼아왔다. 그들의 반지성주의에 매우 힘들었고, 그들의 나를 향한 시선은 따가웠다.


마침내 나와 생각이 같고 추구하는 방향이 같은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 초대를 받았고, 졸업을 앞두거나 인턴 후 자리를 잡으며 상식적인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드디어 내가 원했던 좋은 사람들과의 교류야!” 하면서 숨이 트일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원하지 않는 사회의 물이 들어버린 것만 같은 내 상태가 수치스럽다. 사람을 사귀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마음을 여는 것이 두려워 지는 것, 강경하고 차가운 겉모습으로 포장한 기성세대들을 꽉막히고 무지하다고 우습게 여겼던 그 모습을, 내가 갖춰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 곳에 초대된 친구들 중 한명은, 난민의 딸이지만 결백한 여학생이였다. 현재는 독일어 구사에 아무 문제가 없으며, 대학과정을 모두 밟고 교양있는 학생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가고 있음에도 - 초대한 친구들 앞에서 나는 그들이 늘상 일으키는 문제에 상당히 불쾌해하는 의견을 비췄고, 정착을 위한 절차에 전면 부정하고 다른 국가에 의존만 하려는 사람들이 몇년이 지나도 현지어를 못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비췄다.


실제로 나는 기본적인 소통조차 안되는 한국인도 만났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패널티가 부과되어야 한다거나, 자신의 편의를 위해 도움을 받고자 부담을 주는 사람들도 겪어왔다. 또한, 파리에서 일어난 총기 사건과 각종 범죄를 일삼는 사람, 심지어 문화를 이해할 생각이 없으며 사회성이 갖춰지지 않은 아랍/아프리카 국가 출신의 사람들로부터 역차별을 수도없이 많이 겪으며 사람을 경계하기되는 태세가 하마터면 진짜 인종차별 주의처럼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대화는 프랑스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독일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은 충분히 고민한 뒤 뚜렷한 원인과 결과를 가진 문장으로 정리해서 대화하는 문화적 차이가 있다. 모두가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지는 않는 눈치였으나 때때로 싸해지는 분위기는, 쥐구멍에 숨고싶을 정도로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게 만들었다.


돌아오는 길, 프라이부르크에 살고있는 친구와 같은 방향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내 옆에 앉은 팔레스타인 출신의 대학생 한명이 내게 말을 건넸다.


“ 한국사람이에요?”


한국말을 너무 유창하게 해서 놀라웠다. 그녀는 우연히 내 휴대폰에 쓰인 글을 보고 한국인인 것을 알게되었고,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고 다니고있는 학교에 한국인 친구들이 많아서 날 보니 반가웠다고 한다.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그녀는 내게 이것저것 관심을 가지고 물어봤다.


“아라빅 친구 많아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괜히 그녀에게 아랍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도 차별적인 발언이 될 것 같고, 이것저것 조심스러워졌다. 그녀에게 사실 파리에서 사람을 사귀는 것 자체가 아주 조심스럽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뒤로 나와 비슷한 상황이거나 검증된 인맥 안에서 거치지 않은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게 어려워졌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대신 미안해요, 너무 너무 창피해...”


눈물을 흘리던 여자아이를 보고, 나도 더이상 어떤 표정과 태도를 갖춰야할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까지도 갑작스럽게 길에서 만난 인연에게 연락처를 묻고 계속 안부를 주고받는 것에 의심을 하고 있었다. 물론, 오스트리아에서 공부를 하고 유창한 한국어와 독일어를 할 수 있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는 문제없는 국제시민이다.


하지만 이미 여러차례 불화를 겪었던 입장에서, 그녀에게 무조건적으로 너의 입장과 너의 사람들이 무결하고 옳다고, 일어서서 국가적 정체성을 찾으라던가 하는 공부를 지지해준다거나 응원해주기에는 내 처지도 만만치않게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사실, 그녀가 나보다 훨씬 유리하고 좋은 환경에서 살고있는 편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 친구는 기차에서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게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요, 내가 대신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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