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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가 필요해

로맨스보다는, 판타지!

by 사온


오늘이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는 삶의 서사에는 기승전결이 존재하지 않는다. 훌륭한 작품은 불필요한 수식 없이 정 제되어 있다. 우리의 인생 또한 군더더기 없이 흘러가야 할 것 같지만, 마주하는 우연에는 오히려 약간의 MSG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매 순간이 드라마처럼 지속되고, 권태와 공허를 일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때로는 지나치게 감각적이고 과장된 장면들이야말로 삶을 버티게 하는 장치가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우연은, 때때로 필연처럼 여겨져야만 한다. 그렇게 시작된 자의적인 선택은, 남들에겐 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에게는 자신만의 판타 지로 기능한다. 그리고 그 판타지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어떤 서사 속을 살아가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 <아홉살 인생이 있다면, 미국에는 <원스 어폰어 타임인 어메리카>가 있다. 20세기 초 뉴욕의 유대인 빈민가 소년 들은 일찍이 세상사에 눈을 떴고, 어른의 세계를 모방했다. 그들만의 질서도 존재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폭력과 강탈이 당연 한 수단이었다. 몰래 훔쳐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주인공 누들스의 첫사랑 데보라는 우아하면서도 발칙했다.


그들의 사랑은 치졸했고, 때로는 폭력적일 때에만 가능했다. 소년들에게 "가능한 여자"였던 페기를 위한 대가는, 돈도 계약도 아닌 새하얀 크림 케이크였다. 누들스는 어렵게 구한 케이크를 문 앞에 놓고 그녀를 기다린다. 하지만 눈 앞에 놓인 달콤한 유혹 앞에서, 끝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계단 한켠에 앉아 허겁지겁 케이크를 먹어버린다. 그렇게 아이의 은밀한 로맨스는 시작되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녹아내리고 만다.


때로는 떡볶이를 잔고 걱정 없이 사먹고 싶다. 아주 피곤하지 않은 이상, 30분-40분 거리라면 망설임 없이 걷는다. 그러다 뜨끈한 쌀국수 집을 지나고, 지글지글 찌개 냄새가 나는 한인 식당과 마트를 거쳐, 분식 코너 앞에 멈춰선다. 한 팩에 한화 만 원쯤 하는 김밥과 떡볶이를 바라보며, 교통비 오천원을 아끼겠다고 걸어온 발걸음을 잠시 후회한다. 한달에 한번씩 여자에 게 찾아오는 마법은 결국 이성을 무너뜨린다. 쫀득하고 매콤달콤한 떡볶이를 입에 넣는 순간, 내가 이걸 그렇게까지 원했는 지조차 잊는다. 배고픔 앞에 패배한 의지는 결국 우연이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게 된다.


생존 의지와 합리적 선택을 거스르게 하는 욕망은 뉴욕의 고아들이 품었던 것처럼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이 앵겔지수는 파 리의 튈르리 정원 한가운데 놓인 분수처럼, 어느날 불시에 아주 높이 솟구친다. 봄이 시작되면, 크림치즈처럼 뭉게지는 구름 아래, 꽃들에 둘러싸인 그 분수는 샹들리에처럼 햇빛을 반짝이며 중력을 거슬러 오른다. 낭만인지 낭비인지 알 수 없는 소비를 '판타지'라 이름 붙이는 일은,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우리의 유일한 미학일지도 모른다.


예뻐지고 싶은 욕망은 분명히 있으나, 옷과 화장품을 위해 다른 지출을 줄일 만큼 절제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신 색연필 붓, 물감, 오일파스텔 등 화려한 색감의 화구들을 갖추면 부자가 된 기분을 느낀다. 브랜드 가치가 높은 문구와 화구의 매력 에 빠지기 시작하면, 삶 속에서 허용 가능한 사치의 범위는 끝도 없이 확장된다. 수채화 물감과 상성이 좋은 전용 종이나, 크 로키와 뎃생용 종이 역시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더 나은 감각, 더 깊은 생각을 끌어내기 위한 도구에 대한 투자는, 점점 더 과감해진다.


몰스킨 노트를 좋아한다. 스쳐지나가는 상념은 휴대폰 메모장이 아닌, 무려 10유로가 넘는 가죽 커버의 노트에 쓰는 것은 실로 사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이 브랜드에는 마법의 힘이 깃들어 있다.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아이디어를 적기 에는 이만한 것이 없다. 좋은 생각이든 아니든 써내려가는 데에 막힘이 없게 하는 미끄러운 종이 표면엔 특별한 장치가 있달 까. 무인양품의 문구는 몰스킨과는 다르게 정리와 구조화에 최적화되어 있다. 얇은 잉크펜은 당사의 노트에 무언가를 적을 때 까슬히 마찰을 일으키며 또렷하게 출력된다. 얇은 잉크펜이 그들의 노트에 남기는 까슬한 마찰감은, 문장을 또렷하게 각 인시킨다. 문구류는 같은 브랜드로 통일해 사용하는 것이 활용도도 높고, 무엇보다 궁합이 좋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작곡과 친구들이 쓰는 파란색 파버카스텔 2B 연필에 빠져 있었다. 대한음악사 각인이 선명한 그 연필은, 마치 내가 음악가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헨레, 파데레프스키, 부조니 같은 명망 높은 출판사의 악보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도구는 그 자체로 내게 판타지를 부여했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그런 물건이 있기를 바란다.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닌, 오직 나만의 만족을 위한 작은 장치들.

전기세와 난방비를 아껴 어두운 방에서 촛불을 켜고 지낼지언정,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판타지...

아마도 우리 모두에겐 그런 것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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