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가득한 계절이 되면, 유럽피안들은 곧장 얇은 천을 챙겨 공원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잔듸밭 위에 누워 일광욕을 즐긴다. 나는 천 대신 하얀 방수 점퍼를 입고,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쓴 채로 풀밭에 눕는다. 이 하얀 우비는 독일의 잡화점 ‘kik’에서 10유로도 채 되지 않는 값에 구입한 것이다. 5년 넘게 입었지만, 헤진 곳 하나 없이 여전히 멀쩡하다. 덕분에 풀에 맺힌 이슬이 옷에 스미지도 않고 없고, 풀독이 오를 걱정도 없으며, 작은 벌레들로부터도 철저히 보호받는다. 그렇게 심란한 마음을 햇살 아래 진정시킨다.
유럽피안들은 강아지를 사랑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의 배경이 영국 런던이라는 사실도, 어쩐지 납득이 간다. 공원의 곳곳은 강아지들의 실례로 가득하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풀밭에 눕는다. 영국처럼 비흡연자와 반려견이 없는 공간이 따로 구획된 곳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파리에서 그런 장소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영국 여행, 아니 어쩌면 귀양살이 같았던 시절, 나는 글로스터 도서관에서 하루 평균 아홉 시간씩 외국어 공부에 몰두했다. 기력이 다하면, 역시나 하얀 우비를 걸친 채 근처 공원에 한동안 누워 있었다. 그 때도 나는 끊임없이 의심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그렇게 파릇한 풀잎을 가만가만 만졌다. 손 끝에 닿는 까슬한 잎파리를 만지작거리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에드워드 양식의 영국식 건물들이 하늘 아래 차츰 옅어지고, 열한살, 친구들과 함께 걷던 길을 떠올린다.
초여름. 뾰족하게 솟은 벼 모종들이, 찰랑이는 물기가 얕게 머금어진 진흙땅 위로 파릇파릇 돋아났다. 낮은 산을 병풍처럼 두른 연둣빛 논을 따라 우리는 책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들고 아지트로 향했다. 학교가 끝나면, 콜라와 과자를 사 들고 그 곳에 모여 작은 파티를 열었다. 방과 후 시간은, 훗날 각자의 삶으로 흩어지며 더는 돌아갈 수 없는 향수가 되었다.
엄마는 늘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내 교복을 다리미로 새것처럼 다려주셨다. 급식이 입맛에 맞지 않다고 하면 도시락을 직접 싸주셨고, 그 덕에 가끔 친구들로부터 부잣집 딸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때로는 선생님께서 은근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기대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내게 필요했던 건, 우아한 옷 매무새가 아니라 성장기에 꼭 섭취해야할 적색육, 학년이 올라갈 때 마다 바뀌는 필수 참고서, 그리고 시기적절한 사교육과 전략적인 입시 설계였다. 순박하지만 보수적이고, 대단히 고집이 강하신 부모님은 내게 늘 검소하게 순응하는 삶에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사랑은 컸지만, 실리적이고 전략적인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개복수술 후유증으로 인해 한때 유체이탈을 겪을 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는 회복력이 좋아 에너지가 강했고,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다. 학교 성적도 나쁘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내 몸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나 스스로도 약한 체력을 그저 “굶지 않는 자의 연약한 핑계”로 치부하며 자책하곤 했다. 예민해진 성격과 고갈된 체력이 서서히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제도권의 요구에 응답하려 애썼다.
그런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조건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적응’은 오히려 다른 이름의 선물이 되었다. 적응했더라면 결코 마주할 수 없었을 낯설고 유의미한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갔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시골 마을의 한 시인으로부터 글쓰기 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엔 잘 몰랐지만, 훗날 그 수업이 내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신문 사설을 분석하고, 문장을 쓰는 법을 배웠던 그 경험은 어학연수나 조기유학 없이도 영어를 빠르게 습득할 수 있게 한 밑바탕이 되었다.
영국 여행 중,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나는 에어비앤비 숙소를 급히 빠져나와야 했다. 우연히도, 이후 한 노부부의 집에 머물게 되었고, 그 곳에서 나는 ‘언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두 아들과 피아노를 전공한 막내아들이 모두 출가를 해서 텅 빈 집. 그곳에, 낯선 한국인 여자아이가 불시착한 셈이었다.
노부부 중 아내는 언어학을 전공한 여인으로, 그녀는 마치 오래전 내게 시를 쓰는 법을 알려준 것처럼 말과 글을 꼼꼼히 첨삭해주셨다. 그 때 나는 학교 시험과 입시에는 당장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시인의 글쓰기 수업이, 영국에 와서 다시 배운 언어 그 자체에 대한 접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미래 설계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였던 일들이 꽤 많았다. 낭만에 사는 피아노 학원의 “봉고차 아찌”로 부터 배운 플루트, 보수적인 시골 성당의 신부님이 고집하신 그레고리안 성가 낭독. 뜻도 모르는 라틴어를 무심히 따라 읊조르던 그 시간들은 어쩌면 아주 어릴 적부터 유럽 문화의 기운에 스며든 경험이었는지도 모른다.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없었던 시골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성당의 수석 반주자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비교적 도시였던 청주에서 ‘오르간 아카데미’의 정식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모든 경험이, 언뜻 보면 아무 목적 없이 흘러간 시간 같지만 지금 내가 유럽에서 불편함 없이 살아가는 데에 조용히 작용하는 밑거름이 되어준 건 아닐까— 이제는 그렇게 믿게 된다.
통념상 ‘프로’란 일정한 수입이 있고,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사람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자유롭게 써온 글은 제약을 받게 되고, 나의 주된 목적이었던 ‘여유를 가지고 성장하기’는 정체될 위험이 생긴다. 그러나 온전히 어떤 행위 자체의 물성이 그 자체로 가치를 띄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프로의 영역이 아니라 그 밖의 차원에 닿는다.
미리 준비된 기반 위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는 일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런 작업은 사랑받고 주목받기 전까지, 절대적인 예술성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기만 한다. 실제로 나는 드러나야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오랫동안 숨겨왔다. SNS 활동은 늘 몇 달을 넘기지 못했고,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줄곧 일기장 속에만 꼭꼭 숨겨두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쌓아두었던 말들과 생각들이, 더는 가만히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듯하다.
모든 작업은 내 주전공인 음악을 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담백하게, 큰 기대 없이 시작한 일이라고 해서 실망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 그런 작업 태도는 더 큰 배신감으로 돌아왔다. 나는 분명히 배웠다. 어떤 작업이든, 절대 가볍게 대하지 말자고.
언젠가는 나도 글과 그림을 출판할 생각이다. 하지만 내 작업은 어디까지나 나의 성장 과정의 일부다. 그 속에 누군가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공감을 유도하거나, 일파만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당위는 없다. 이것은 그저 기록이고, 내 삶의 일부이며, 예술 활동의 결과물이라기보다 내가 나에게 남기는 조각 같은 것이다. 어쩌면 이 글들은 내가 하지 못한 말, 하지 못한 인사, 표현하지 못한 감정의 트랙을 따라가는 지도에 가깝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를 프로라 부르기 전까지는,
나는 아마 평생 아마추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