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섹스보다 깊고, 사케보다 맑은 세계

by 사온

담배 냄새를 좋아한다. 불이 닿은 종이에 잎사귀가 서 서히 타들어가며 퍼지는 냄새는, 어떤 종류의 위로를 건 넨다. 태우면 행복해지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중독에 취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껏 한 번도 흡연을 해본 적이 없다.


그 대신, 집 안에서는 가끔 말린 풀과 꽃들을 엮은 스머지 스틱이나 팔로산토를 태운다. 때로는 제사용 향을 피우기도 한다. 불을 붙이는 그 짧은 행위에는 일종의 의례성이 있고, 연기를 바라보는 동안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나 정신의 정돈을 위한 도구라는 사실을 잊는 순간, 이 연약한 의식은 곧 자극에 대한 탐닉 으로 넘어간다


불안함을 잊기 위해 사람들은 무엇이든 태우고 취한다 . 그것이 종이든 담배든, 향이든 술이든……. 불안과 외로움은 불과 술을 원한다. 고흐와 보들레르가 사랑했던 압생트, 한순간 고통을 망각하게 하는 자극의 힘. 그것은 언제나 금단의 언저리에 존재하며,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듯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고 위험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예민한 편이었고, 의외로 겁이 많아 눈을 자주 깜빡이거나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버릇이 있었다. 내 생각엔 그 모든 불안한 움직임이 악기를 다 루며 점차 소멸되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연습에 몰두 하는 일은 '노력' 한다는 차원보다는 나의 기질, 혹은 도피와 닮아 있었다. 악기를 곁에 둘 수 없는 날 에는 다른 방식으로라도 손을 써야 했다.


그렇게 뎃생을 시작했다. 사물의 경계선을 따라 손이 움직이는 순간에는 사념들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손을 움직이며 어떤 질감과 마찰하는 감각에 몰입하는 일은, 섹스보다 행복하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종종 나 를 열정적이고 성실한 사람이라 착각하지만, 나는 실제 로 많은 면에서 게으르고 유약하다.


꿈같았던 프라이부르크의 생활은 예고 없이 막을 내렸다. 독일 체류 허가에 실패한 뒤,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아 영국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영어 실력을 다졌다. 이후 프랑스에서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프랑스 체류 허가를 준비하며 잠시 한국에 머무르던 시기, 마음이 복잡할 때면 성당을 찾았다. 묵주기도를 바치고, 쓰고, 칠하고, 치고, 켜고, 때로는 부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앞 성당 책장 한켠에 놓인 『쓰면 이루어진다』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무언가를 써내려가다 보면, 무의식이 미래의 가능성까지 끌어다 쓴다’는 문장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마음 깊숙이 파고들던 그 말에 이끌려, 나는 마치 진짜 부적이라도 쓰듯 일기장에 ‘만나고 싶은 사람’의 얼굴과 이름, 말투와 분위기까지 적기 시작했다.


이름: 이스마엘. (가장 사랑하는 소설, 허먼 멜빌의 『 모비딕」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

생김새: 라틴계 혈통이 느껴지는 다부진 체격과 곱슬 머리의 유럽피안.

직업: 시인


몇 달 뒤, 파리 로댕미술관 근처의 아파트에서 피아니스트 친구의 앙상블 리허설이 열렸다. 나는 초대를 받아 그 자리에 갔고, 그곳에서 놀랍게도 내가 상상 속에 그려두었던 모습 그대로의 남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테너 가수로 섭외되어 있었고, 약력을 보니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실제로 시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이스마엘이였다.


우리는 짧게 인사를 나눈 뒤, 다시 각자의 세계로 흩어졌다. 더 이상의 인연은 없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현실이 나의 무의식을 반영한 것만 같았다.


돌이켜보니 그런 경험은 한 번이 아니였다. 그 책을 만나기 전, 2018년 겨울, 파리. 귀국을 앞두고, 프랑스에 두 달 정도 머물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 도시에 정착하게 될 거라 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108배와 묵주 기도를 했다. 불교와 가톨릭이 뒤섞인 엉뚱한 조합이었 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108배는 고요한 깨달음을 위한 도구일 뿐이며, 신은 그 모든 형식을 초월해 나의 진심을 이해하실 거라는 것을. 그리고 기도했다.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게 단 한 번만, 그 증거를 보여주세요."


이후 그 기도를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무심코 일기장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백건우 선생님을 만나뵙고 싶다." 그 바로 다음 날, 집주인이자 한인 신문사 사장님께서 불쑥 바이올린 콘서트 티켓 한 장을 건네주셨고, 나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그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정말로 백건우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다 가가기엔 너무 크고 먼 존재라 조용히 멀리서 바라보기

만 했는데, 놀랍게도 그 멀리서 나를 보고 계시던 선생 님이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셨다.


노동은 신성하다. 반복하는 행위 안에는 매혹과 환락 이 들어올 틈이 없다. 무의미해 보이는 선 긋기, 메트로 놈 박자에 맞춰 같은 음을 반복하는 연습, 가구에 튀어 나온 못의 나사를 조이는 일, 일기장에 그저 꿈일 뿐인 허욕과 희망의 그 언저리를 적어대는 것, 일률적인 문장을 무한히 반복해 전하는 감사와 안부의 인사...


우리는 시지프다.

산꼭대기까지 큰 바위를 밀어올리고,

그 것이 다시 굴러 떨어지면 다시 밀어올린다.

사케보다 맑은 세계 안에서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고,

현실의 파도를 통제한다.

keyword
이전 06화안녕, 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