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폰원피스와 트렌치코트 코디 어때요?
나는 어느 순간부터,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닌 누군가의 자전적 서사에 더 이상 깊이 연루되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무슨 사정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었는지, 그런 이야기에 감흥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내가 일했던 곳의 매니저는 중국계 프랑스인으로, 만 열여섯 살 때부터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그들의 인생은 우리와는 달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곤 했다. 매니저는 고등학교 졸업반 무렵부터 바로 사회에 나와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한국식 정서로 보면, 수능을 포기하고 고졸로 생업에 뛰어든 셈이다. 자신이 번 돈 대부분은 조부모와 함께 감당해야 할 월세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늘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일원이라는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움직였다. 근무 중 잠깐 남는 시간에 틱톡이나 릴스 같은 숏폼 영상을 보는 일쯤은 너그럽게 넘길 만큼, 융통성 있고 쿨했다. 하지만 책을 펼치기만 하면, 별다른 이유 없이 자리를 옮기게 하거나 불필요한 지시를 반복하며 괜한 트집을 잡았다.
“나는 백인을 혐오해.”
그녀는 이런 차별적인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특히 백인 여성에 대해선 유독 반감이 심하게 드러났다. 누가봐도 정중하고 단정한, 흠잡을 데 없는 백인 여성 손님에게조차 얼굴을 굳히고 불쾌한 태도로 응대했다. 반면, 무례한 흑인 손님에게는 오히려 너그럽고 노련한 태도로 관용을 베풀어보였다.
매니저는 그녀와 나를 같은 편으로 묶으며 “우리”라는 수식어를 곧잘 사용했다. 같이 일하는 남자직원 중 한 명은 오전에만 잠깐 나와 단순 업무를 돕고 퇴근했는데, 그 이유는 페이가 적더라도 공부에 집중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매니저는 그런 그를 보면서, ‘그의 인생은 우리와 달라’라고 명확한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또래 친구들이 선택한 학업의 길이 애초에 부유한 이들의 특권이라 여겼다. 그런 특권 계층과는 삶이 다르다는 암묵적 합의, 그 안에서 형성된 동질감과 연대의식은, 사회적 소외를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작동하는 일방향적 정의로 기능했다. 나름의 자유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한, 일종의 저항 정신이기도 했다.
그 곳의 중국인 여사장은 프랑스어와 영어에 서툴었다. 그녀는 가게 일을 돕던 자신의 남자 조카가 아주 조금이라도 더 일하게 될까 봐 늘 매의 눈으로 감시했다. 언젠가 그녀는 걸레에서 세정제 냄새가 빠지지 않는다며, 내 얼굴에 닿기 직전까지 들이밀었다. 말보다 먼저 다가오는 모욕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떤 날은 도시락에 들어갈 고기 한 점을 넣었다 빼기 반복하며, 몇 분이나 양 조절을 두고 실랑이가 이어졌다. 그런 식의 애매하고 불필요한 지시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한 손님이 갑자기 양파가 싫다며 손사래를 쳤다. 문제는, 얇게 썰린 양파와 국수처럼 가는 그린빈이 한데 섞여 있다는 것. 국자만큼 커다란 집게로 그린빈만 하나하나 골라 담는 일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집게를 들고, 그린빈과 양파를 구분하려 애썼다. 바로 그때, 사장이 다가왔다. 소리도 없이, 살갗이 닿을 듯한 거리까지 바싹 다가와서는 내 귀에 속삭였다.
“양파 싫다잖아. 너 불어 못 알아들어?”
순간, 소름이 끼쳤다.
사장과 매니저는 때때로 일의 효율성과는 전혀 무관한 ‘연출’을 하곤 했다. 특히 외국어가 필요한 순간이면 더더욱. 처음엔 영어와 불어에 능숙하지 않은 여사장과 동료들을 대신해 내가 투입되었고, 손님 응대도 자연스럽게 맡게 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동선이 꼬이고 굳이 나설 필요 없는 순간에도 그들은 외국인 손님 앞에 먼저 나섰다.
사랑받고 싶어서.
쇄골에서 가슴골까지 이어진 타투, 노출이 큰 민소매에 늘어진 치마, 수입에 비해 값이 꽤나 나가는 액세서리들. 그런 정황들로 미루어 볼 때,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폭발하는 예술의지’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배움’ 같은 낭만적 동기가 아니었다.
단 하나—누군가에게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 그 막연하고도 절실한 마음은, 때때로 애처롭게까지 보였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꺾이고 꺾여왔기 때문에,
더이상 꺾이지 않기 위해 먼저 누군가를 꺾는다.
‘꺾일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단지 같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인 사람은 도리어 묻는다.
대체 무엇을 꺾어야, 야무지게 꺾었다고 소문이 날까.
나로 하여금 그들의 가치를 어떻게 확인시켜 줄 수 있을까.
나로 하여금, 존경과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여자임을 그들에게 어떻게 확인시킬 수 있는가...
사실, 방법은 없다.
그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를 마음속으로만 되뇌일 뿐이다.
사실, 이런 실용적인 상황에서 가장 회피하기 좋은 방책은 언제나 비실용적인 것들로 치환된다. 매일 아침, 한국문화원에서 빌려온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든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같은 책들을 출근 가방에 넣으며 다짐한다. 조금만 버티면, 나만 아는 우아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외부 진열용 냉장고 유리를 뽀득뽀득 닦으며, 귀를 찌르는 중국인들의 말싸움을 뒤로한 채, 머릿속은 사유로 가득 차오른다. 나는 왜 매일 아침 그렇게 힘겹게 일어나, 이런 고생을 감내하며, 이 끝나지 않는 노동의 굴레 안에 머물고 있는 걸까. 그 순간 “아침이라는 악을 견디고 우리가 일어나야만 하는 이유”를 말했던 마르쿠스가 떠오른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 고된 노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때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 속 한 문장이 불쑥 떠오른다.
“누군가는 결국 해야 할 일.”
“나 말고 누군가가 하겠지”가 아니라,
“누군가는 해야 하니, 그 누군가가 내가 되겠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처럼,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이야말로 내가 진정 해야 할 일 아닐까—곰곰이 곱씹는다. 그리고 문득, 내가 생각보다 쓸모없는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데 닿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버린 타인의 삶에 대한 연민, 그런식의 개인주의는, 문유석 판사가 선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내 편의를 위한 "신경 끄기" 기술은 오히려 내 삶을 점점 더 투박하고 거칠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무언가에 홀린 듯, 한두 번 입고 손이 가지 않던 플라워 프린팅 원피스 두 벌을 꺼냈다. 하늘하늘한 롱 가디건, 소매가 짧아 방치해뒀던 트렌치코트도 함께 챙겼다. 한때는 중고로 팔아보려 했지만, 절차가 번거로워 미뤄둔 채 옷장 안쪽에 깊이 잠들어 있었던 것들이었다.
거친 콘크리트 바닥 위로 날개 옷들이 담긴 트렁크를 '돌돌돌' 소리를 내며 끌고 도착한 곳은, 제법 규모가 큰 사회주택 단지였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은 영화 속에 종종 등장하는 20세기 유럽의 여자 기숙학교를 연상시켰다. 그곳엔 미혼모와 그 아이들, 난민여성들, 그리고 전쟁고아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스쳤다. 이 옷들이 일반 유럽 여성에겐 조금 작지 않을까.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 옷들을 입게 될 이는, 어쩌면 미혼모가 아니라 이곳에서 자라난 어린 소녀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프랑스는 급진적 페미니즘과 실용적 인권 담론이 공존하는 사회로, 실제 정책 집행 현장에서는 성별 정치보다 사회적 연대와 인간의 기본 권리에 방점이 찍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피해 여성이나 미성년 보호가 필요한 경우, 여성단체가 우선적으로 보호·지원 역할을 수행하고, 이후 행정기관이 개입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로서 활동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어떤 정치적 정체성이든, 사회적 입장이든 간에, 눈앞의 선한 일 앞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손을 내밀고 싶다는 마음이 앞선다.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어떤 제도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낙오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들이 여성이고, 아이들이며, 더 나아가 국제정치의 폐해로 삶이 무너진 전쟁 난민들이라면,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은 종종 국가가 아닌 여성단체에 이양된다.
그 순간만큼은 성별 간의 첨예한 대립을 잠시 뒤로하고, 한 인간의 존엄과 생존을 우선시해야 한다. 입장이 아닌 존재로, 견해가 아닌 삶으로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곳의 벽돌 건물만큼이나 단단하고 분명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하던 여사장과 매니저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아프게 익숙했다. 보호받지 못한 채 세상 가장자리로 밀려난 소녀들, 아직 자신의 몸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경계 밖에 선 아이들. 어쩌면 그들 역시, 그런 시절을 겪고도 잊은 채 상처를 껴안고 사회에 나온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사랑받고 싶어 애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겪은 불편함은, 그날의 기부로 조용히 정리되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정말 필요한 무언가로 전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