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신파와 위스키

by 사온


너무 행복해하면 귀신이 질투한다. 그래서 그 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는 말이 있다. 아주 작은 행복조차도 마음껏 표현하기 어렵다. 단순히 누군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마음의 진동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언제나 또 다른 파동을 불러일으킨다.


삶을 위한 기본적인 것들이 아주 간발의 차이로, 그리고 그렇게 하나씩 지속적으로 망가져본 적이 있는가?


나의 주거공간은, 마침내 책장을 들여놓으며 거의 완성되었다. 4년이 걸렸다. 갖고 있던 모든 책을 바닥이 아닌 책장에 올려놓게 된 것이다. 아직 옷장과 서랍은 없어 캐리어에 보관하고 있지만, 그 날, 독일에서 샀던 빈티지한 틴케이스를 드디어 꺼내놓을 수 있어 유독 행복했다.


하얀 얼음 빙수가 크레용의 질감으로 프린팅된 아주 옅은 핑크색의 틴케이스. 4년 전 구입했지만 여전히 새 것처럼 반짝인다. 나는 물건을 오래도록 깨끗하게 쓰는 편이라 이사하면서 망가지지만 않으면 때가 묻지 않는다.


정돈된 메자닌 공간에서, 작곡의 기본이 되는 화성학의 반절쯤을 익히고 나니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정말 음악학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리듬을, 절대로 깨고 싶지 않았다. 너무 어렵게 만든 안정이었기 때문이다.


밀린 월세도 거의 갚아가고 있었다. 오후 세 시쯤, 공부를 마치고 책을 덮고,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나도 제도권 안에서, 준비된 학생으로서 전문적인 커리어를 쌓을 수 있겠구나.’

비록 늦었지만, 그래도 희망이 느껴졌다.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뒷뜰 별채까지 가는 길.

가벼운 마음으로 파스타 재료를 들고 문을 열었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

정확히는, 잠금장치가 부서져 있었다.


이윽고 찾아온 과학수사팀은 내 심리적 안정을 최대한 존중해줬다. 웃으며 일을 진행하는 그들은 너무나 바빠서, 나보다 더 나쁜 범죄에 노출되어있는 사람을 위해 재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도둑들은 내 옷과 이불을 밟았고, 수사팀은 그들의 흔적을 밟기 위해 신발을 신은 채로 나의 공간을 샅샅히 수색했다. 지문이 남을 만한 물건들은 모두 탁자 위로 옮겨졌다.

그들은 어떤 가루가 묻어있는 브러쉬를 들어올린 뒤 매끄럽고 반짝이던 물건들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내가 아끼던 것들은 하나둘씩 빛을 잃었다. 빙수가 그려진 빈티지 틴케이스에도 푸른빛의 때가 묻었다. 지문은 찾을 수 없었다.


그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냉장고가 터졌고, 이어 밤중에는 수도관이 터졌다. 업자를 불렀지만, 그들은 협박 끝에 내 통장에 남아 있던 돈을 전부 빼앗아 갔다. 때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때였다. 물벼락을 맞고, 강추위 속에 떨며, 물도 나오지 않고, 냉장고도 쓸 수 없는 현실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운좋게 구한 일을 빼앗겼고, 글에 대한 저작권조차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큰 위기를 겪을 정도로 모험을 하지 않으니 나름 운이 좋은 사람일지도, 혹은 아주 좋은 기회를 간발의 차로 계 속해서 미끄러뜨리는 운이 나쁜 사람일지도. 평균적으로 모아둔 돈이라던가, 직장에서 얻는 평균적인 수입이라던가, 조 금씩 쌓아 올려 가진 직책 혹은 그 것도 아니라면 쌓아놨을 어떤 커리어라도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아주 큰 모험으로 인해 절망에 빠져 큰 빚을 안고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또다른 과제를 떠안고 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런 현실에 웃음이 터져버린다. 폐허가 되어가는 상황이 한번, 두번이 아닌 몇 개월, 몇 년이 지속되면 빨간 립스틱으로 삐에로처럼 웃는 입꼬리를 그리고 싶어진다. 삶의 추한 것들만을 들춰내 조롱하고 풍자하는 스트리머들의 우스꽝스러운 외침이 어쩐지 통쾌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Rock and Roll Part 2의 음악에 맞춰 계단 위에서 활짝 웃으며 춤을 추는 조커처럼, 모든 것들을 부수고,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반항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봄이 찾아왔다.


위 사진은 파리의 부르스 드 코메르스(Bourse de Commerce)에서 개최된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에서 기획되었던 전시 사진이다. 작가는 연인과의 이별 후 이 작업을 시작했다. 여기저기 널부러진 가구들, 부서진 의자, 무너진 욕조. 지직거리는 축음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이름모를 재즈 음악은 덧없는 물질 세계의 적막을 위로하듯 채운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기억, 도시 속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불안정한 사람들... 하얀 천은 이런 무너져도 누군가에게 드러낼 수 없는 개인의 불안을 모른척 덮어준다. 삶은 파괴되고, 파괴된 삶은 신파를 유혹한다. 해골들이 나타나 춤을 출 것만 같다.


전시를 보고 돌아오는 길, 앙상한 몸에 중절모를 쓰고 딸과 함께 파리의 한 어귀에서 나타났던 H아저씨가 떠올랐다. 말기 암으로 인해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저씨는 후배들을 비롯해 동료작가들 그리고 그 외 많은 사람들과 늘 함께하고 싶어하셨다. 내게 아저씨는 해리포터 세계관의 시리우스 블랙과 같은 존재였다.


시리우스 블랙은 해리 포터의 대부(代父)로서, 낳아준 부모가 모두 채워줄 수 없던 자존감의 빈자리를 메워준 유일한 어른으로, 해리에게 최고급 성능의 마법 빗자루인 파이어볼트를 선물했다.그 장면은 마치 삶을 즐길 자격이 너에게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없더라도, 비가 내려도 그 속에서 춤을 출 수 있는 그런 낭만만은 잃고싶지 않았다. H아저씨는 내게 이런 순간을 위스키와 함께 견디는 법을 알려주셨다. 그래서 나는 집에 위스키 한 병을 늘 비치해둔다. 이제는 냉장고도 작동하지 않으니, 예전에 하이볼을 위해 사두었던 일제 생활용품점의 동그란 얼음틀은 쓸 일도 없다. 그렇게, 미지근한 위스키를 작은 잔에 따라 마신다. 그래도 술잔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추한 것도 아름답다.

엉망진창이라 행복하다.

아무튼 다행이다.

이보다 더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를 위로하다 보면,

그조차도 귀신의 질투를 살지도 모르니—


가끔은, 절망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세상과의 공정한 거래인지도 모르겠다.


이 글은 올해 초 쓰여진 글로, 현재는 망가진 집에서 더이상 살지 않고, 돌아가신 H아저씨가 살던 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저씨의 딸은 제 일러스트의 미어캣 캐릭터 "링링"으로,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친자매와 다름 없는 소중한 동생이에요. 일러스트에 관한 이야기와 다른 것들이 궁금하시다면, 제 브런치 계정의 캐릭터 네네 이야기도 둘러봐주세요!
keyword
이전 09화사랑받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