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늪'에 푹 빠졌네.. 매혹적인 '용늪'풍광에.

강원도 인제^양구 대암산 용늪 트레킹.

by 박상준

땅바닥이 우묵하게 뭉떵 빠지고 늘 물이 괴어있는 바닥은 수렁처럼 진흙 투성이다. 그래서 위기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늘 등장한다. “젠장 늪에 빠졌네”.

그 늪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 그냥 '늪'이 아니고 '용늪'이다. 산 밑에 있는 늪이 아니라 해발 1319m의 대암산 정상 언저리에 있는 커다란 늪이다.

포효하고 용틀임하며 하늘 높이 솟구친 대암산 용이 남긴 소중한 선물이다.

우리도 그 늪에 빠져보기로 했다. 진 수렁 '위기의 늪'이 아니라 마음을 빼 앗는 '매혹적인 늪'으로...


강원도 인제^양구의 '커다란 바위산' 대암산(1,314m) 8부 고지엔 흔하고 진부한 전설을 간직한 습지가 있다. 올림픽 메인스타디움만 한 사이즈로 이름 하여 '용늪'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쉬었다 가는 곳'이라고 하여 붙여졌다.

누가 붙였는지는 몰라도 아주 틀린 이름은 아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올법한 스토리지만 상상 속의 용이 잠시 머물다 승천한다면 용늪이 최적지일 터이다.

용늪은 신비스러운 기운과 아우라를 뿜어내는 매혹적인 습원이다.

이틀에 한 번꼴로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가 늪을 뒤덮는다.

이 때문에 늦가을에는 을씨년스럽면서도 비현실적인 풍경화를 그려낸다.

그 늪의 좁은 목도(木道) 위를 걸을 때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느껴진다.

자연생태 그대로를 머금은 습원과 연못, 그곳을 터전 삼아 자란 풀과 꽃, 나무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층습원의 재발견이다.

(버스에서 내려 대암산 출입통제소까지 임도를 따라 4km를 걸어가야 한다)


대암산 용늪은 함부로 사람을 들이지 않는다. 출입이 까다롭기 짝이 없는 불친절한 코스다. 산 자체가 북한과 40km 정도 떨어진 군사보호구역에 있기도 하지만 용늪은 환경부에서 관리하기 때문이다.

대암산 가는 길은 인제 쪽으로 두 코스와 양구 쪽으로 한 코스가 있다.

우린 서흥리 코스처럼 일정액의 가이드비를 요구하거나, 가야리 코스처럼 군사도로를 멀리 걸어야 하는 인제 대신 양구 코스를 선택했다.

한 달 전에는 양구 에코 자연생태공원 사이트에 예약을 한 뒤 20일 전 참가자 리스트를 보내야 한다. 그럼 그쪽에서 연락이 온다. 신분증과 보안각서를 지참하고 오전 9시 30분까지 도착해야 한다고.

내가 사는 청주에선 아침 5시 30분에 출발해야 한다. 난 출발시간에 맞추기 위해 4시 30분에 기상했다. 17년 전 금강산 방문에 못지않을 만큼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고 새벽잠을 설치고 장시간 버스를 타야 했다.

대암산 용늪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일까. 이 같은 질문이 양구로 향하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감돌았다.



대암산 출입통제소에 도착하니 원주지방환경청 소속의 가이드(자연해설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60대 초반에 탄탄한 몸매를 지닌 남자였다. 경험이 풍부해 보였다.

그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했지만 내게 가장 기억 남는 것은 "다리가

여러 개가 아니라면 '발목지뢰'를 조심하라는 말이다. 썰렁한 ‘아재 개그'를 들려주며며 도로를 이탈하지 말라고 우회적으로 강조했다.

우린 출입통제소에서 다시 3km의 1차선 구불구불한 길을 버스로 이동한 뒤 대형버스가 회차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에서 하차했다. 해발 700m의 찬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곳에서 용늪 입구까지 3.5km를 걸어가야 한다. 콘크리트가 깔린 군사도로지만 올라갈수록 전망이 빼어나고 길 주변엔 비록 절정은 지났지만 늦가을 정취를 물씬 풍기는 단풍이 길을 밝혔다.

무엇보다 심호흡할 때마다 청정 자연의 신선한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드는 느낌이다. 순도 100%의 공기만 마셔도 본 전은 뽑는다는 말이 과장은 아니었다.

걷기 시작한 지 40분 만에 해발 1200m에 위치한 용늪 입구 위병소에 도착했다. 바람이 거칠어지고 수은주가 급격히 떨어졌다.

그곳에서 신분증을 맡기고 배낭에서 바람막이를 꺼내 입은 뒤 국내 유일의 고층습원 용늪으로 향했다.


(대암산 습지는 좁은 데크길만 걸을 수 있다)


평평한 산등성이는 온통 잿빛이었다. 황량한 벌판이 감정선을 자극했다.

안개가 수시로 시야를 가렸다. 심한 일교차로 냉기류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길은 돌이 깔려있었다. 흔한 돌이지만 그냥 깔아놓은 것이 아니다.

환경오염에 취약한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하나 정성껏 닦아낸 돌이다.

용늪 표지석에 도착하자 안개는 사라지고 흐린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용늪 전망대에서 바라본 황금빛 용늪은 경이로웠다.

용늪은 빗물이 고인 분지에 물이끼와 같은 습지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고 이 것이 다시 4천500년 동안 한 곳에 켜켜이 쌓이면서 형성된 것이다.

한여름엔 연녹색 생명의 빛깔을 뽐내는 사초류는 가을이 되면서 금빛으로 물들었다.

가이드는 "용늪은 삿갓사초, 진퍼리새, 금강초롱등이 꽃의 향연을 펼치는 6월부터 8월까지가 가장 아름답다"며 "다음엔 초여름에 오라"고 권했지만 난 지금 풍경을 보는 것도 좋았다.

물론 용늪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야생화가 만발한 초여름엔 눈과 마음이 호강하고 충만한 자연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스산한 바람이 불고 금빛 사초가 출렁이는 가을 용늪에선 삶을 관조(觀照)하게 된다.



목도를 통해 용늪 감상에 나섰다. 주변 경관을 바라보며 한발 한발 신중하게 내디뎠다. 용늪을 둘러싸고 자작나무 군락이 뽀얀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용늪처럼 고층습원을 개방하기 위해선 목도 설치가 필수다. 드넓은 늪을 가르 지르는 목도는 일본에서 전래된 것이다. 일본 대표적인 고층습원인 오제 국립공원은 1950년대 세계 최초로 목도를 설치했다.

당초엔 등산객의 발이 습지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지금은 습지를 건강하게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목도가 없었다면 용늪 탐방은 어림도 없었으리라.


(습지구간이 끝나면 숲 속으로 이어진 데크길이 나온다)


용늪은 가이드가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 가이드를 따라 일렬로 줄 서서 목도를 걸으며 습지를 관찰하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곳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광에 잠시 마음이 심란했다. 언제 또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목도 위에서 인증 샷을 남기지 못한 동반자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용늪 탐방길은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

용늪을 빠져나오면 대암산 정상으로 올라갈지 결정해야 한다. 가이드는 대암산이 우리나라 100대 명산에 꼽힌 산이라며 기왕 온 김에 정상을 다녀오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난 9부 능선에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정상을 밟는 것도 좋지만 나의 목표는 아니다.

대신 '자연의 타임캡슐'이라고 불리는 용늪 주변과 잿빛 풍경이 펼쳐진 벌판을 차분히 음미(吟味)했다. 바람은 잠잠해지고 구름이 흩어진 하늘엔 햇살이 쏟아졌다.

다시 들머리를 향해 내려가는 길에서 확 트인 시야 때문에 가슴이 뻥 뚫렸다.

대암산 용늪길은 흔히 볼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이 길을 걷기 위해 거쳤던 모든 번거로움과 수고로움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 그런 길이다.


*코스 / 대암산 버스 회차로 하차~용늪 입구~용늪 목도길~대암산 정상~버스 회차로(왕복 11km)


*tip / 용늪에서 주로 서식하는 야생화를 감상하려면 6~8월이 적기다.

이때가 용늪의 풍경에 활력이 샘솟고 생기가 돋는다. 하지만 황금빛으로 빛나는 가을 용늪도 운치가 있다. 탐방예약은 보름 전부터 받지만 주말엔 예약이 금방 끝나 원하는 일정에 가려면 한 달 전부터 서두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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