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들의 영혼' 경주 남산 시간여행.

용장마을에서 삼릉탐방소까지 남산을 걸으며...

by 박상준


남산, 흔한 이름이다. 같은 이름의 산이 전국 각지에 널려있다.

하지만 경주 남산은 귀한 산이다. 토산(土山)과 암산(岩山)의 절묘한 조화 때문에 귀한 것이 아니라 삼국을 통일하고 천년왕국을 일군 신라시대의 석불을 시대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신라 석불의 보고(寶庫) 이기 때문이다.


또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고 신라 말 경애왕이 견훤의 칼에 죽은 곳도 남산이니 신라 천년의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그래서 용장마을에서 삼릉탐방소까지 남산을 걷는 것은 숲 속에서 보물을 찾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화사하게 핀 떼죽꽃)


하늘이 비를 품은 채 잔뜩 찌푸린 주말, '신라인들의 영혼'이 담긴 산, 남산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남산은 비가 오는 대신 흐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걷기 여행이 됐다.

보통은 삼릉탐방소에서 시작해 용장마을에서 마무리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꾸로 출발했다. 그 길이 더 경사가 완만하고 그 유명한 삼릉 소나무 숲에서 대미(大尾)를 장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년 신라의 발자취가 생생하게 남은 남산 숲은 걷는 곳곳마다 봄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처음 맞는 풍경은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용장계곡.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 골짜기로 남산에서 가장 큰 계곡이다. 불교왕국인 신라시대엔 계곡 주변에 무려 16개 사찰과 7기의 석탑이 있었지만 지금은 상당수 흔적만 남았다.

용장계곡은 조선 세조 때 대학자이자 승려인 설잠스님(김시습)이 세조의 소명(召命)을 거절하고 매월당이라는 초당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하늘에 떠있는 듯한 용장골 3층 석탑)


암산(岩山) 답게 바위 사이로 낭랑한 소리를 지르며 물이 흘렀다. 계곡 주변엔 마치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길가의 좁은 바위틈 사이에 나그네들이 뭔가 간절한 마음으로 돌멩이를 올려놓았다. 화사하게 핀 떼죽 꽃은 흐린 길을 환하게 밝혔다.


용장 계곡을 벗어나 대숲 터널을 400m 정도 걸으면 용장사터가 나온다. 통일신라시대 때 대현(大賢) 스님이 법상종을 개창(開倉)한 절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절은 간데없고 우거진 잡초 사이로 주춧돌만 몇 개 남아있다.

절터를 나와 바위 길로 올라서면 석불좌상(보물 187호)과 마애여래좌상(보물 913호)이 나타난다. 남산에서 유일한 고려 초기 작품으로 씩씩하고 아름다운 청년기 모습이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동네 총각처럼 푸근하고 친근한 인상이다.


두 보물 뒤로 이어지는 가파른 나무 데크길을 부지런히 올라가면 돌탑이 서있는 능선에 닿고 잠시 내려가면 바위산을 하층 기단으로 삼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을 만난다.

탑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뿜어낸다. 해발 400m의 바위산 좁은 터에 탑이 솟아있어 3층 석탑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석탑이다.


평지가 아닌 자연의 암반 위에 세워진 탑은 파격적이다. 주변의 자연환경과도 조화를 이뤄 바라보기만 해도 묘한 감동을 준다.

그래서 용장골 석탑은 경주 남산을 상징하는 오브제다. 이런 작품이 산재한 남산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말이 맞다.

좀 더 머물고 싶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다시 금오봉을 향해 오르다 보면 탁월한 전망이 펼쳐진다. 영축산, 신불산, 간월산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가 조망되고 멀리 천성산도 보인다.


남산 관광 임도를 거쳐 조붓한 오솔길을 걸어 올라가면 정상석(해발 467m)이 나온다. 퍽 높이 온 듯했는데 금오봉 꼭대기 분위기는 수시로 산책을 즐기는 청주 구룡산 정상과 비숫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금오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경주 유적지)


하산 길은 세계문화유산 '경주'를 내려다볼 수 있는'뷰 포인트'가 이어진다. 거대한 바위 위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 일대를 바라보면 시야도, 가슴이 확 트인다.

멀리 테크 길 아래로 가파른 산세에 둥지를 튼 상선암의 울굿 불 굿 한 연등 아랫사람들로 복작였다. 단양에 있는 계곡 '상선암'과 이름이 같은데 이곳은 선방(禪房)이 높은 곳에 위치해 '상선암'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예전엔 스님들이 참선하던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산행객들이 워낙 많이 찾아 참선'하기엔 너무 소란스러웠다.


평지로 내려와 계곡 길을 걷는데 머리 없는 부처님이 단정이 앉아있었고 그 곁에 몰려든 관람객들 사이에서 문화해설사가 열변을 통하고 있었다. 이 좌상은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 이곳에 안치한 것이다.

누군가 '일본 놈'들의 소행이 아니냐고 묻자 문화해설사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불상의 훼손을 일본인들이 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일본인들은 문화재만큼은 소중하게 관리한다"며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문화재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삼릉숲 내려가기 전에 들린 상선암)


어느덧 삼릉숲이 보였다. 마음이 설렜다.

어떤 풍경은 바라보기만 해도 마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남산 삼릉에 있는 소나무 숲이 그런 곳이다.

올곧은 소나무, 휘어지고 구부러진 소나무, 서로 엉켜 몸을 지탱하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삼릉숲은 신비롭고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서 이 풍경에 들어선 순간 그림의 주인공이 된다.


이 숲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이른 아침, 숲을 점령한 짙은 안개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는 일출 때다.

그 황홀한 풍광을 피사체에 담은 사진작가 배병우는 2005년 포토 런던에서 팝스타 엘톤존에게 사진 한 장을 1만 5천 파운드(2천820만 원)에 팔면서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고 경주 삼릉 소나무 숲은 국제적인 명소가 됐다.


우리 일행이 삼릉숲에 도착했을 때 하늘이 흐릿해 빛이 표현하는 아름다움은 없었지만 장엄함과 역동성이 혼재한 소나무 숲 특유의 운치는 여전했다.

소나무는 기개와 절개를 상징하지만 때론 신령스러운 나무이기도 하다.

배병우는 "경주의 소나무는 경배를 위한 것이다. 천년 신라 왕들의 무덤가엔 늘 솔밭이 있다. 무덤가에 심는 소나무를 '도리숲'이라고 하는데 소나무는 땅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다"라고 말했다.


경주 삼릉^금오봉 트레킹은 짙은 여운이 남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하늘까지 도와 3시간 40분 문화답사 트레킹을 끝낸 뒤에야 비가 쏟아졌다. 이 길은 풍경 하나하나에 천년 묵은 스토리가 담겨 있다. 그래서 두루두루 오래도록 뇌리에 남지 않을 수 없다.


*코스 / 용장마을~용장 계곡~용장골 3층 석탑~금오봉 정상~상선암~삼릉 탐방소(9.5km)


*tip / 이 길은 삼릉탐방소에서 출발해 용장마을에서 마무리하는 코스다. 하지만 용장마을에서 시작해 삼릉탐방소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걷기 편할 뿐 아니라 삼릉 송림의 그림 같은 풍경이 트레킹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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