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된 엔지니어 - 04
디자이너이자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러지스트이며 저자인 박동윤(Yoon Park)은 현재 미국 시애틀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의 Mixed Reality Design & UX Research 팀에서 Principal UX Designer로서 홀로렌즈 및 혼합현실 서비스와 관련된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다.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반도체 설계 및 모바일 소프트웨어 연구원으로 일하다 그래픽 디자인이 너무 좋아 시각 디자인을 다시 공부하여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새롭게 시작했다.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2011년 Typography Insight앱을 출시했으며, 현실 공간에서 타입 레이아웃을 가능하게 하는 Type In Space라는 홀로렌즈용 앱을 만들기도 했다.
홈페이지 - http://dongyoonpark.com
링크드인 - https://www.linkedin.com/in/cre8ivepark/
오지 않을 것 같던 2011년 8월 1일이 오고야 말았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디자이너로 첫 출근을 하게 되는 날이다. 나의 매니저인 로드니와 약속한 대로 나는 오전 10시에 벨뷰의 시티센터 건물의 4층 리셉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고 일을 하게 되다니, 그것도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디자이너로서. 아직도 실감이 안 나고 긴장이 많이 된다. 과연 영어로 잘 소통하고 일을 할 수 있을까?
이윽고 로드니가 나타나 반갑게 인사한다. 로드니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 디자인 팀의 사무실로 향한다. 인터뷰 과정에서 만났던 팀 동료들과 인사하고 내 자리를 안내받았다. 오픈스페이스 형태의 사무실이 몇 섹션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대략 여섯 명 정도가 한 섹션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내 컴퓨터와 모니터는 설치가 되어있어 소프트웨어 구성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MSIT(Microsoft IT, 마이크로소프트의 컴퓨터와 네트워크 등 전반적인 IT 인프라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준비해준 안내문을 보며 윈도즈 7을 회사의 도메인에 가입시키고 나의 애일리 어스 (alias, 마이크로소프트의 사내 아이디와 같은 용도로, 여덟 글자 이내로 구성되며 주로 이름으로부터 글자를 따온다) dongpark을 이용해서 컴퓨터에 로그인을 할 수 있게 구성했다. 옆자리의 동료인 맷은 보통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환경을 셋업하고 자리를 잡는데 며칠은 걸린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되자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하나둘씩 조용히 사라졌다가 샌드위치 등 먹을거리를 사들고 와서는 책상 모니터 앞에서 먹는 것 아닌가. 그리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도 함께 모여가지 않고 각자 미팅이나 업무 스케줄에 맞게 혼자 다녀오는 것이었다. 한국 회사의 문화에 익숙한 나에게는 당연히 “동윤 씨 밥 먹으러 가요” 하며 우르르 함께 식당으로 향하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로드니와 타냐 등 마침 점심을 먹으러 가는 시간이 맞는 멤버들만 같이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업무를 마무리하는 광경도 신기했는데, 네다섯 시 근처로 하나둘씩 조용히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가끔 “굿나잇” 이나 “씨유” 등으로 가볍게 인사하고 퇴근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 조용히 자연스럽게 퇴근을 했다. 삼성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먹고 밤 11시가 넘어 퇴근하던 생활을 자주 했던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미국 첫 직장, 디자이너로서의 첫 출근 하루를 무사히 마친 것에 감사하며 나도 짐을 싸서 퇴근을 했다.
어느 회사나 그렇듯이 마이크로소프트에도 새로 고용된 직원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이에 참석하기 위해 며칠간은 팀이 있는 벨뷰 오피스가 아닌, 메인 캠퍼스인 레드몬드로 출근을 했다. 수백 명의 새로운 마이크로소프트 직원들이 모여 전반적인 회사의 소개 및 캠퍼스 빌딩의 위치들, 유용한 사내 인트라넷, 다양한 혜택 들 그리고 빌딩 간 이동시에 사용 가능한 셔틀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사실 삼성에 취업할 때 6주간 SVP라는 나름 고생스러운 신입사원 수련회를 경험한 나로서는 약간 졸리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월급이 한 달에 두 번에 나누어 지급이 된다는 점이다. 즉, 매월 1일과 15일에 지급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카드비 지출 등 매월 중순에 나가는 비용들이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신입사원 온보딩을 위해 향한 레드몬드의 메인 캠퍼스
출근 후 며칠간은 단순히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고, 팀 내부 서버에서 공유된 디자인 파일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파이어웍스 등)을 살펴보며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팀 내에는 프로젝트 명이나 업무의 과정 등 상당히 많은 요소에 대해 축약어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용어들에 대해 정리해놓은 원노트가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설명을 읽어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중 파워포인트로 된 프레젠테이션 파일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예전 중요한 프로젝트 보고에 쓰인 듯한 몇몇 파일이 있었다. 그중 빙 아이패드 앱에 대한 디자인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볼 수 있었다. 팀에 합류하기 전에 미리 팀이 하는 일에 대해 준비를 하기 위해 빙의 다양한 서비스 — 웹, 모바일, 태블릿, Xbox 등을 사용해 보았는데, 앱 디자인 과정과 몇 가지 옵션의 장/단점 등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들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특히 내비게이션이나 서치박스의 레이아웃 등 세심한 요소들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엿보였다. 빙 아이패드 앱의 디자인은 옆 섹션에 앉아있는 디에고라는 디자이너의 작업이었는데, 첫 만남에서 열정적으로 앱을 보여주며 소개하던 기억이 난다. 빙 아이패드 앱은 앱 스토어에서 높은 별점과 함께 상당히 좋은 리뷰를 받고 있었다. 나도 타이포그래피 인사이트 등 여러 앱을 통해 상당히 훌륭한 별점과 리뷰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아직은 특별히 지시받은 업무가 없었기에, 빙 아이패드 앱을 이리저리 사용해 보던 중 검색 결과 화면의 링크와 미리 보기 텍스트 화면이 상대적으로 컴퓨터보다 작은 아이패드의 화면에는 부담스러워 보였다. 미리 보기 텍스트를 감추고 원하는 결과 페이지에 대해서만 보여주면 어떨까? 이때 단순히 버튼이나 드롭다운과 같은 통상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요소가 아닌 아이패드가 가지는 멀티터치라는 특징적인 제스처를 사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Objective-C를 이용해 금방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는데, 핀치 제스처 — 양 손가락을 터치한 후 벌리거나 오므리는 동작 — 을 통해 검색 결과의 미리 보기 텍스트를 보이거나 감출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사용자에게 보이는 정보의 밀도를 점진적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로드니에게 프로토타입을 보여주었고, 로드니는 함께 나를 데리고 로라 — 로드니의 매니저, 즉 나의 스킵 매니저 — 의 사무실로 가서 데모를 하게 했다. 당장 프로덕트에 적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재미있다는 반응들을 보였다.
이후 몇 주간은 점점 팀의 다양한 미팅에 참가하면서 다양한 프로젝트들에 대해 조금씩 이해를 하게 되었고, 특히 SERP (Search Engine Result Page) 등의 다양한 용어들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빙 검색엔진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이해였는데,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군이 상당히 방대하기 때문에, 자체 검색 엔진인 빙이 없었다면 수많은 제품들이 타사의 검색 엔진에 의존했어야 하는 상황임을 생각해 보면 금방 빙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빙은 점유율이 계속 상승하는 상태였다.
첫 프로토타입 이후에도 계속 나의 관심사인 타이포그래피와 관련된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다양한 기기와 화면에서 빙 검색엔진의 결과 페이지의 데이터 모듈들이 어떻게 레이아웃 되고 보일지에 대한 가변적인 타입 및 카드의 크기 등을 조절할 수 있는 타입 툴킷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