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된 엔지니어 - 03
디자이너이자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러지스트이며 저자인 박동윤(Yoon Park)은 현재 미국 시애틀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의 Mixed Reality Design & UX Research 팀에서 Principal UX Designer로서 홀로렌즈 및 혼합현실 서비스와 관련된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다.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반도체 설계 및 모바일 소프트웨어 연구원으로 일하다 그래픽 디자인이 너무 좋아 시각 디자인을 다시 공부하여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새롭게 시작했다.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2011년 Typography Insight앱을 출시했으며, 현실 공간에서 타입 레이아웃을 가능하게 하는 Type In Space라는 홀로렌즈용 앱을 만들기도 했다.
홈페이지 - http://dongyoonpark.com
링크드인 - https://www.linkedin.com/in/cre8ivepark/
파슨스에서의 마지막 학기, 석사 논문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던 어느 날, 학교에서 인턴쉽 페어(internship fair)라는 행사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 관련 회사들이 있었는데,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참여 목록에 보였다. 2011년 당시만 해도 나에게 마이크로소프트는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회사였기 때문에 솔직히 지원하고 싶은 회사는 아니었다.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관심과 Flash, Flex 등 당시의 인터렉티브 미디어를 이끌던 회사인 어도비와 같은 회사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인턴쉽 페어 행사 당일 장소를 방문해 보니 어쩐 일인지 구글에서는 사람들이 아직 오지 않아 부스가 비어있었고 옆 부스에 마이크로소프트의 뉴욕 오피스에서 디자이너 두 명이 나와 있었다. 인상이 좋아 보여 마음 편하게 인사를 건네고 이야기가 이어져 노트북에 담아온 내 작업들을 보여주고 인쇄해 가져온 레쥬메를 건네주었다. 몇 달간의 인턴쉽 기회가 있다는 소개를 해 주었지만, 졸업을 당장 앞두고 1년 이내에 취업 비자를 얻어야 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풀타임 포지션을 구해야 했기에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자리를 떠났다.
몇 주 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연락이 왔는데, 감사하게도 시애틀 레드몬드의 본사에 풀타임 포지션이 났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정식 인터뷰 스케줄로 이어졌는데, 온 사이트(on-site: 실제 회사에 방문해서 진행하는 인터뷰) 인터뷰 이전에 리크루터와 전화와 이메일로 간략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이메일로 받은 질문들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어떤 종류의 일을 하고 싶은지?
잡 포지션을 결정할 때 어떤 요소들이 가장 너에게 중요한지?
포트폴리오나 레쥬메의 내용 중에서 좀 더 깊이 질문을 받고 싶은 것들을 한두 가지 골라보면?
다음 5–10년간 너의 커리어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싶은지?
이외 로지스 티컬 한 내용들: 언제 일을 시작하고 싶은지? 릴로케이션을 하고 싶은지? 다른 오퍼를 이미 받고 있는지? 비자 현황 등.
뉴욕이 미국 첫 도시였던 나는 시애틀이 어디에 있는 도시인지 지도를 찾아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정 반대인 서부의 북쪽 끝에 위치한 시애틀은,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본 흐릿한 기억이 전부인 전혀 생소한 도시였다.
리크루터가 예약해준 일정에 맞추어 비행기를 타고 시애틀-타코마 국제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탔다. 역시나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대로 회색 하늘에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마련해준 숙소는 마이크로소프트 본사 캠퍼스가 있는 레드몬드라는 도시에 있는 메리어트 코티야드 호텔이었다. 다행히 준비해온 영상 케이블이 방의 티브이와 연결이 되어서 프레젠테이션 연습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몇 차례 포트폴리오 프레젠테이션 연습을 하고 씻고, 너무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한 번 더 프레젠테이션 연습을 하고, 택시를 타고 안내문에서 알려준 마이크로소프트 111 빌딩에 도착했다. 담당 리크루터가 몇 가지 질문들을 하고 오늘의 일정에 대해 알려준다. 아침에 팀 사람들에게 디자인 포트폴리오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이후에는 각각의 사람들과 1:1 인터뷰를 여러 명 진행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셔틀을 타면 인터뷰를 하는 건물에 데려다준다고 한다. 건물 앞에 나와 알려준 번호의 셔틀을 기다리니 금세 승용차 한 대가 도착한다. 흰색과 녹색의 그래픽으로 꾸며진 차에 마이크로소프트의 로고와 Shuttle Connect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셔틀이 레드몬드 캠퍼스를 출발해서 어느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시애틀이 마이크로소프트의 도시 라더니 사무실 역시 넓은 지역에 걸쳐 있나 보다. 고속도로를 탄 셔틀은 벨뷰의 시티센터라는 빌딩 나를 내려줬다. 레드몬드의 메인 캠퍼스의 저층 건물들과는 다르게 보다 도심 속의 높은 빌딩이었다. 내려서 4층 리셉션에 도착하니 리셉셔니스트가 인터뷰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준다고 한다.
잠시 후 오늘 인터뷰를 하게 될 디자인팀의 매니저인 로드니가 나타났다. 인사를 하고 따라서 6층의 디자인 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10여 명 정도의 자리가 있는 컨퍼런스 룸으로 나를 안내하고, 포트폴리오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부탁했다. 아직 9시가 되기에는 20여분 정도 시간 여유가 있어 서두르지 않고 화면 테스트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 널려있는 케이블 중에 다행히 가져온 랩탑의 DVI-D 케이블에 맞는 케이블이 있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한 번에 프로젝트에 화면이 뜬다. 그것도 올바른 해상도로. 천만다행이다. 프로젝터 연결과 해상도 문제만 없어도 이미 절반은 해결된 느낌이다.
이윽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컨퍼런스 룸으로 들어온다. 그중 로라 컨 이라는 디자인 팀의 디렉터도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올 때마다 긴장감이 늘어난다. 어느새 컨퍼런스 룸이 꽉 차게 되었다. 시작해도 좋겠다는 로드니의 말에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돌아가며 소개를 마치고 내 소개를 진행한다. 긴장이 되면 목소리가 떨리고 먹히고 이 때문에 더 긴장하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다행히도 첫 프로젝트 소개를 시작하며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한다. 연습한 대로 말하고 싶었던 포인트들을 까먹지 않고 잘 짚어가며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고, 중간중간 사람들의 좋은 반응들을 둘러보며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한 시간 정도의 프레젠테이션과 질문 답변이 무사히 잘 끝났다. 다행히 내가 전하고 싶은 나의 작업들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했고 만족스러웠다. 남은 1:1 인터뷰를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지만, 프레젠테이션 만이라도 여한 없이 해냈다는 점에 스스로 뿌듯했다. 컨퍼런스 룸을 나와 다음 인터뷰 일정 전까지 10여 분간의 휴식을 취하라고 한다. 같은 층의 허브(주방과 테이블 등이 있는 오픈된 휴식공간)로 안내를 해주며 원하는 커피나 음료를 마시라고 한다. 일단 코트를 벗고 한숨을 돌리며 물을 마시는데, 인터뷰 전부터의 긴장으로 인한 속 쓰림이 이제야 느껴진다. 이때, 아까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했던 한 사람이 다가와 훌륭한 프레젠테이션이었다며 한마디 인사를 건네고 “Good luck with your interview today.” 라며 돌아간다. 분명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 이리라. 이 한마디에 속 쓰림과 긴장이 한결 가벼워졌고, 마음이 놓였다.
이어진 1:1 인터뷰는 함께 일하게 될 디자이너나 프로그램 매니저들과 진행하게 되었다. 주로 프레젠테이션에서 소개한 내 프로젝트들에 대해서 보다 깊게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 점심때는 식사를 하며 하는 1:1 인터뷰 시간이었는데, 이때 매니저인 로드니와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해당 건물의 식당은 꼭대기 층이 23층에 있었는데, 마침 시애틀의 화창한 날씨로 먼 곳에 엄청난 규모의 설산을 보게 되었다. 눈이 덮인 아름다운 산이 창밖 멀리 보였는데, 나중에 유명한 레이니어 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식사 중 인터뷰에는 솔직히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인터뷰들이 끝나고 마지막에 높은 직급의 분위기를 풍기는 브라이언이라는 분의 사무실에 들르게 되었는데, 로드니가 내 소개를 하며 내 아이폰 프로그래밍 책을 브라이언에게 보여주라고 한다. 아마도 이분이 앱 개발/디자인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는 생각을 했다. 후에 돌이켜보니, 아마도 정규 인터뷰 스케줄에 없던 빙 그룹의 그룹장인 부사장 브라이언 맥의 사무실에 들러 유력한 채용 후보자인 나를 소개해 준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1:1 인터뷰 과정에서 디자인 과제는 없었다. 디자인 과제란 말 그대로 어떤 디자인 문제를 던져주고 어떻게 디자인을 할지에 대한 설루션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문제 해결 과정과 그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가늠해 보는 인터뷰 방식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1:1 인터뷰 과정이 내 프로젝트에 대한 질문이나 나의 관심사 등이었고, 내가 가진 질문들이었다. 나는 주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는 방식이나 디자인 팀의 역할 등에 대해 질문을 했다. 솔직히 이때까지만 해도 마이크로소프트는 엔지니어링 중심의 소프트웨어 회사라고 생각했고,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회사라고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과연 디자이너가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마지막 1:1 인터뷰를 마치니 오후 다섯 시가 넘었다. 총 여덟 명의 디자이너, 엔지니어, 프로그램 매니저 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로드니와 디자인 팀 멤버들과 인사를 하는데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을 물어본다. 밤 열 시 정도라고 하니 시애틀에 처음 와본 것을 알고, 시애틀 다운타운에 들러 저녁을 먹고 가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이라는 곳에 들러보라고 하는데, 솔직히 하루 종일 진행된 인터뷰에 진이 빠져 아무래도 호텔 숙소에 들러 좀 쉬고 공항으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로드니와 팀 멤버들과 인사를 하고 셔틀을 타고 111 빌딩에 도착해서 리크루터와 인터뷰 과정의 마무리를 하고 숙소로 향했다. 밤 비행기가 힘들긴 하겠지만, 미국에서의 첫 인터뷰를 무사히 잘 해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축하를 건넨다.
아직 대학원의 마지막 학기가 끝나지 않는 4월 이기에 여전히 수업을 들으며 막바지 과제들 및 졸업 논문 작업들을 진행 중이었다. 인터뷰를 한지 며칠 되지 않아 리크루터에게 전화가 왔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Full-time UX Designer 포지션에 채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실감이 나지 않고 멍한 느낌이었다. 유학생의 신분으로 졸업 후 1년의 OPT기간 내에 비자를 지원해주는 미국 회사를 찾고 취업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많이 들어왔기에,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학업 중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할 뻔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던 지난 2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기쁨과 감동의 마음 위에 걱정과 근심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미국 회사에서 영어를 사용하면서 사람들과 일을 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