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가다'하는 사람이야 VS 나는 시방서와 도면을 보는 '기술자'야
20여 년을 다닌 직장을 명예퇴직하고 나니 딸레미는 대학생, 동반자는 수도권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나 혼자 너무 심심했다.
동반자에게 하소연했더니 '그럼 나 따라와서 일해보던가.. 어렵지 않으니까'하길래 딸의 대학도 수원이고, 동반자의 직장도 평택이라 좋다고 따라나섰다.
동반자의 직장은 평택 삼성전자 신축건설현장이다. 나의 동반자는 거기에서 수장(가벽, 벽체를 세우는 직종) 일을 하고 있었으며, 이 작업에 수반되는 장비들이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유도를 하고, 기술인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가이드해 주는 것이 내 할 일이었다.
처음 나 따라와서 일해보던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20여 년 동안 마우스와 편집 프로그램(포토샵, 일러스트, 매킨토시)만 만지던 내가 가서 할 수 있을까, 일하는 동료들이 얼마나 거칠 것인가, 그 수많은 자재들과 먼지, 소음 등을 내가 다 견뎌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먼저였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나도 두어 달을 고해의 바다에 빠져있었다. 어느 노래 제목처럼 '인생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동반자를 따라나섰다.
숙소를 구하고, 입사서류를 제출하고, 입사일을 기다렸다. 입사일을 기다리면서 개인안전장구류를 지급받았다. 텔레비전에서만 보았던 안전모(내 눈엔 헬멧), 안전화(내 눈엔 등산화), 확성기와 경광봉이었다.
입사일에 지급받은 개인 잔정 장구류를 풀장 착하고, 출근을 했다. 안전시험도 봐서 유도증이라는 자격 카드도 받았다. 이미 있던 같은 팀의 상냥한 언니들이 도와주어서 일에 적응이 쉽고 빨랐다. 물론 눈물도 쏙 뺐다.
나는 일단 출근해서 현장 상황에 대해 많이 놀랐다. 일반 공사장에서 보던 중구난방의 상황이 아니라 여느 사무실같이 먼지 없이 깔끔한 바닥, 줄 맞추어 다니는 기술인들, 기계장비들, 열과 오가 맞게 쌓여있는 자재들이 건축자재판매회사 창고에 들어온 거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도 안전기준에 맞게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거 같았다. 나는 장비가 움직일 때 다른 사람들이 장비 근처로 와서 다치는 일이 없도록만 하면 됐다.
처음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도 집에서 '내가 노가다를 견뎌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고민도 많았는데, 출근을 하고 나니 '노가다'라는 말을 여기에 적용하는 건 좀 그렇다. 거기에서 일하는 내 동반자도 '노가다꾼'이 아닌 '시방서와 도면을 보는 엔지니어'이며, 나도 '노가다꾼'이 아닌 '장비 유도자'이다.
노가다는 공사판의 노동자/막일꾼 또는 '막일을 하는 것'을 뜻한다. '노가다'는 일본어의 잔재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낮춰 부르는 말이므로, 가능한 삼가야 하는 표현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도면과 시방서를 볼 줄 알아야 하고, 현장의 전체 아우트라인을 그릴 줄 아는 전문가가 되어야 일을 진행할 수가 있다. 일을 처음 하는 사람도 들어오면 맨 먼저 장비 이름, 자재 이름, 공구 이름과 현장에 세워진 기둥으로 현장 전체를 바둑판으로 나눠 머릿속에 넣는 것을 제일 먼저 한다. 그러면서 H빔과 스터드와 석고로 벽을 치면서 현장 전체의 그림 그리는 방법을 배우고 익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 머릿속으로 현장의 필드를 나누거나 합치는 일이 능숙해지고 시방서의 기준을 지키면서 시공을 하는 수준에 이르면 '엔지니어'가 된다.
박사학위를 딸 때 몇 년을 공부하고 논문을 쓰는 것처럼 현장에서도 몇 년을 일하면서 기술과 설치방법을 배우고 익혀서 '엔지니어'로 탈바꿈한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하고 이제 벌써 2년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일을 하면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있다.
'내가 학교도 많이 안 다녀서 할 게 없어 막일 일을 하게 됐는데... 벌써 3년이나 됐네. 언제나 이 노가다에서 벗어나누'라는 말이다.
학교를 많이 안 다녀서 3년이나 노가다를 했는데 아직도 노가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은 3년을 현장에서 지내면서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게 '엔지니어'의 눈에도 띄어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는 말이다. 3년이면 서당개도 풍월을 읊는다고 했는데 하물며 사람이 같은 일을 3년이나 했는데 그동안 배우고 익힌 것이 없어 자기 자신을 '엔지니어'로 부르지 못하고 '노가다꾼'이라 칭하는 것이다.
'노가다'에서 무슨 부귀와 영화를 누리겠다고 배우고 익히겠냐 중간쯤만 하고 일당 받으면 장땡이지 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지 말고, 현장에서 '노가다 중의 탑'이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나는 엔지니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한다면 이 사회에서 현장에서 일하는 '노가다'라는 말은 사라지고, 새로이 '엔지니어'라는 말이 '노가다'라는 말을 대치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나도 '장비유도자'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했으나 지금은 '행정사무'라인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래도 '현장의 엔지니어'라는 꿈은 가슴 한편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나를 내가 존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얼굴과 행동은 다르다. 내가 나를 존중하고, 무던히 노력을 하면 학교 많이 안 다녔어도 이 사회에 자리매김할 수 있다.
내가 존중받아야 마땅할 사람이 되는 것은 나한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