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를 대하는 ‘또 다른 방법’
Tokyo Keyword / 인지증 認知症
아직 40대 중반임에도 노화가 두렵다. 내 경우 몸의 통증이나 기력의 부족함 보다 먼저 신경 쓰이는 것은 날로 줄어드는 기억력이다.
“팀장님, OOO건은 어떻게 할까요?” “응, 그게 뭐지?” “지난번에 XXX 하라고 하셨는데…” “아, 내가… 그랬지?!”
겨우 며칠 전 내가 내린 지시를 민망하고 낯설게 접한다. 유명 연예인의 성을 바꿔 말하거나 과거에 접한 책, 영화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좌절하는 것도 예사가 됐다.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 속 3초 기억력 물고기, 도리가 된 기분이 들 때가 많아졌다. 도리는 긍정왕이지만, 현실의 나는 그렇지 못하다.
일본에서 마트에 갈 때마다 ‘기억력 개선’을 강조하는 요구르트를 어김없이 샀다. 효과는 잘 모르겠지만 이왕 마시는 음료라면 그래도 조금 뇌에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절로 손이 갔다. 20년 전 이미 초고령사회가 된 이 나라에는 요구르트뿐 아니라 껌이나 영양제 등 기억력을 강조하는 식품군이 꽤 많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도 기억력 개선을 강조하는 뇌 영양제 광고가 줄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성분이 포스피틸렌이랬던가, 포스피탈셀린인가(검색해 보니, 포스파티딜세린이었다). TV광고를 볼 때마다 구매욕이 샘솟아 약국에 가면 사야지 마음먹지만 그 조차 매번 까먹어서 아직도 구입을 못했다. 갈수록 두려움은 커진다. 두려움의 끝에는 노화로 인한 뇌 기능 퇴화, 치매가 있다.
‘치매’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들여온 말이라고 한다. ‘어리석다’ ‘미치다’는 뜻의 치(癡), 역시 ‘어리석다’는 뜻의 매(呆)를 합친 말인데, 정작 그 말을 만들어낸 일본에서는 더 이상 쓰지 않는다. 2004년 일본 후생성은 치매가 차별적 표현이라며 ‘인지증’이라는 말로 바꿨다. 인지증은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처럼 인지 기능에 장애가 생긴 증세를 통틀어 하는 표현이 됐다. 말이 전부는 아니지만 말은 공동체의 의식에 영향을 줄 것이다.
과거 이 치매 혹은 인지증에 대한 사회적 대처 방안을 들여다보고자 일본에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출장 준비 당시에는 ‘치매, 우리가 힘을 합치면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같은 희망이 뿜뿜 솟는 기획을 하겠다는 의지에 불탔다. 그때까지 나는 가까이서 인지증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현실에 다가갈수록 기억을 잃는 것이 내 예상보다 훨씬 힘들고 슬픈 일 일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막막할 뿐 아니라 매일 생활 곳곳에서 불편과 위험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열쇠 구멍을 찾지 못해 문을 열지 못하고, 옷을 입지 못해 난처해지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괴로웠다. 주변 가족이 겪는 어려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인지증 간병을 하다가 아버지까지 인지증을 앓게 되며 부모를 모두 간병해야 하는 40대 여성은 눈빛에서 삶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가 더 나은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인지증을 가진 이들을 중고차 세차에 고용하며 상생을 도모하는 마을 자동차 판매점이라든지, 인지증을 가진 당사자와 그 가족 모임을 꾸리는 이들이라든지, 인지증 환자가 가수로 참여하는 음악 밴드라든지 여기저기 여러 사람들을 만나 두서없이 취재를 하며, 희망 뿜뿜까진 아니라도 조금 괜찮은 가능성들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도쿄에 머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나리타 공항 안내 방송의 말 속도는 약간 늘어진 테이프처럼 느리다는 느낌을 줬다. 인지 능력이 저하된 고령자를 비롯해 안내를 받는 이들이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배려한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실제로 외국인인 나로서는 일본어나 영어 안내를 이해할 때 좀 더 편한 측면이 있었다.
인지증 노인을 배려하는 상품도 다양한 편이다. 중고로 산 도쿄 우리 집 가스레인지는 불을 켜놓고 깜박하는 이들을 겨냥해 특정 온도 이상이 되면 음성으로 안내가 됐고, 나중에는 자동 점화가 됐다. 동네에 새로 생긴 주간 노인 돌봄 센터는 외양만 보면 카페처럼 깔끔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이 센터를 지날 때마다 “이 골목에서 제일 좋은 곳 같다”라고 말하곤 했다.
최근 일본 사회는 인지증 환자들이 구성원으로 역할하는 것을 강조하는 분위기다. 일본 정부는 인지증 대책인 ‘오렌지 플랜’에서 ‘인지증 환자의 인권과 의사를 존중하며 정든 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는 걸 밝히고 있다. 공영방송 NHK는 매년 인지증 친화적인 지역 공동체를 선발해 소개한다. 지난해 소개된 한 지역 마트의 경우, 장보기를 어려워하는 인지증 노인들을 위해 특정 시간대를 따로 정해 비워주고 이들이 스스로 장을 볼 수 있도록 지원했다. 편의점이나 은행 등에는 인지증을 가진 손님을 위한 대응 매뉴얼이 준비돼 있다. 노인 4명 중 1명이 인지증을 겪는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찾아낸 자구책이겠지만, 그럼에도 공동체가 이런 경험을 쌓고 함께 나누는 힘은 컸다. 자신이 속한 밴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무대에 오르는 인지증 가수는 “과거 참여한 공연을 기억하진 못해도 무대에 오를 때 즐거운 느낌이 남아있다”라고 말했다. 나는 나와 내 가까운 이들의 노년에 기억이 사라지더라도 저런 기분이 함께 남아있다면 조금 안심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니모를 찾아서’의 인기를 업고 나온, 후속 ‘도리를 찾아서’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도리는 예의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 준 “또 다른 방법은 늘 있다”는 말을 기억한다.
노화로 기억을 잃는 것은 어떻게 포장해도 힘겨운 일이지만, 한 사회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어떻게 지원하고 지지하는가에 따라 그 무게는 조금 가벼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도리 같은 긍정왕이 되긴 어렵더라도 “또 다른 방법”을 함께 찾을 순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