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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치불고 Oct 25. 2024

환절기 목욕탕

Tokyo Keyword / 센토 銭湯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그날 밤 나는 주섬주섬, 그러나 주의 깊게 가방을 꾸렸다. 과거 어딘가에서 받아왔던 샴푸와 트리트먼트 샘플, 바디워시, 머리빗, 그리고 타월 2개와 바디로션까지.


  목적지는 집 근처에 있는 센토(銭湯), 즉 일본식 대중목욕탕이다. 환절기 감기로 시름시름 앓았던 후였다. 곧 있으면 회사일로 한국에 돌아가는 나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주시기로 한 시어머니는 사전답사 겸 도쿄에 오셔서 이 대중탕을 발견하시곤 꼭 이용법을 숙지해 전해달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추우면 무조건 탕에 들어가야 해. 미리 좀 알아봐 줘.”


  물론 우리 집에도 꽤 깊이 있는 욕조가 있지만 어머니는 수도요금을 걱정하신 듯하다. 실제로 최근 어린이들이 탕 목욕을 즐겨한 뒤로 수도요금이 꽤 많이 나오기도 했다. 선선해진 날씨에 온몸이 찌뿌둥한 이 저녁이야말로 대중탕에 갈 적기였다. 나름의 뜻을 품고, 비장한 표정으로 센토로 향했다.   


  새벽 이른 시간부터 문을 여는 한국의 대중목욕탕과 달리 일본의 센토는 보통 오후 2~3시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연다. 내가 찾은 센토는 주택가 모퉁이에 있는 자그마한 곳이었는데, 밤이면 목욕탕 마크의 네온사인이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입구에 들어설 때 나무 조각 열쇠를 사용하는 신발장부터 세월이 느껴지는 곳이었는데, 우리식으로 치면 소형 아파트 거실만한 카운터 겸 휴게실에 주인 할머니가 오도카니 앉아 계셨다. 백발의 할머니는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목욕비는 520엔(약 5000원)이에요.”     


  사실 일본 대중탕 방문, 거창하게 말하면 ‘센토 프로젝트’는 일본에 온 초반부터 생각했던 계획이었다. 살고 있는 동네 소식지에서 우리 구 내 지역 대중탕을 모아 소개한 특집기사를 읽은 직후였다. 기사에 따르면 우리 지역에는 총 9곳의 대중탕이 있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주말 아침마다 동네 목욕탕을 다녔던 추억을 떠올리며, 도쿄의 다른 관광지는 못 가도 필히 이들 대중탕에는 발 도장을 찍어보겠다 다짐했다. 그러나 일본의 여름은 너무 길어서 한동안 수증기 자욱한 온탕에 선뜻 들어서기가 꺼려졌고, 하필 목욕탕 운영시간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과 겹쳐서 번번이 갈 기회를 놓쳤다.


  알려진 것처럼 일본은 탕 목욕 문화가 발달한 나라다. 목욕한다는 표현과 탕에 들어간다는 표현이 같을 만큼 탕에 진심이다. 다만 가정 욕실이 대중화되면서 과거 동네마다 있었던 센토의 수는 줄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목욕탕들은 나름의 자구책으로 화려하게 변신을 하는 중이다. 소식지에는 재즈가 흐르거나 화려한 벽화, 노천탕 등을 자랑하는 대형 목욕탕들도 소개돼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집 근처, 내가 방문한 목욕탕은 정말 단출한 곳이었다. 탈의실과 탕 안은 무척 정결했지만 관광지의 온천탕에 흔히 있는 드라이어기를 비롯해 별다른 편의시설은 전혀 없었다(드라이어는 카운터에 얘기하면 빌릴 수 있다). 탈의실의 사물함과 나무 평상, 저울은 물론, 탕에서 쓰이는 플라스틱 의자와 바가지에서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나마 이곳 목욕탕에서 가장 최근 것으로 보이는 시설은 벽에 붙은 스테인리스 손잡이 지지대였는데, 아마 앉고 서는 게 불편한 노인 손님을 배려한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15석 남짓한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손님은 나포함 2, 3명 정도로 대부분 연세가 있는 분들이었다.


  너무 적막하고 쓸쓸하잖아, 이런 마음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탕에 들어섰다가 황급히 발을 뺐다. 예상보다 꽤, 뜨겁다. 온탕에 몸을 담그지 못하고 망설이는 나를 보고 뒤이어 탕에 들어선 한 아주머니는 온도계를 보시더니 “오늘은 끝날 시간이 가까워져서인지 평소보다 2도 정도 높다”며 찬물을 틀어주셨다. 그제야 온도계를 보니 44도.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탕 난간에 걸친 나를 향해 친절한 아주머니는 한마디 더하셨다. “그래도 뜨거운 게 몸에 좋다니까, 괜찮을 거예요.”


  탕에서 바라본 이들은 모두 자기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몸을 씻었다. 한국의 목욕탕이 다소 시끌벅적한 게 매력이라면 이곳의 매력은 고요함이라는 생각도 했다. 다만 너무 뜨거워서 긴 시간 머물진 못하고 금세 일어났다.


  대략 옷을 갈아입고 밖에 나오니 가을바람 냄새가 여느 때보다 기분 좋게 느껴졌다. 푹 삶은 후 바람 좋은 곳에 널어 금세 마른빨래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마음도 잠시 팔랑거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환절기 감기에 골골거렸던 몸이 신기하게도 한결 좋아졌다. 확실히 뜨거운 탕이 효과가 있었나 보다. 바람 부는 날에는 목욕탕에 가야 한다.  





(커버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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