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것은 최강이에요. ‘멋있다’의 경우 멋지지 않은 면을 보면 환상이 깨질지도 몰라요. 하지만 ‘귀엽다’의 경우 뭘 해도 귀엽다고요. 귀엽다 앞에서는 모두 복종! 두말없이 항복이라 이거예요." <드라마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중>
일본 드라마를 보다가 예쁜데 엄청 귀엽기까지 한 배우 아라가키 유이가 하는 이 대사를 듣곤 무릎을 쳤다. 맞아, 툭하면 ‘가와이이(かわいい·귀엽다)’를 외치는 이 나라 언니들은 일찍이 그런 철학과 전략이 있었구나, 나는 저런 중요한 지혜를 왜 마흔 넘어 알게 된 걸까, 거듭 감탄했다.
귀여움은 사람만 가진 게 아니다. 물건도 장소도 마찬가지. 일본에는 특히 그런 귀여움을 내세운 서비스와 제품이 많다. 도쿄에 온 후 둘째 아이가 처음 갖게 된 휴대전화도 그중 하나였다. 아이에게 일반적인 스마트폰을 쥐여주는 게 꺼려졌던 나와 남편은 시부야의 휴대전화 매장에서 특히 키즈폰을 유심히 살펴봤다.
그 가운데 발견한 모 통신사의 도라에몽 키즈폰. 한국에도 성인용 대비 크기가 작은 키즈폰이 출시된 적이 있지만 일본의 키즈폰은 눈에 띄게 작은 편이다. 3.5인치 화면에, 가로 5cm 세로 10cm 안팎 크기, 100그램 남짓한 무게의 폰은 아이의 작은 손에도 쏙 쥐어졌다.
한정판을 좋아하는 이 나라에선 키즈폰도 한정판 마케팅을 했다. 도라에몽 폰은 당시 매장에 하나 남아있던 상품이었는데, 냉정히 보면 대폭 가격할인에 들어간 기존 구형 키즈폰에 비해 기능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저 만화 도라에몽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가득 그려진 폰 케이스와 화면 보호필름, 도라에몽의 방울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를 추가한 정도가 차별점이었는데 가격은 웬만한 아이폰 구형 버전보다 비쌌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폰을 사고 말았다. 이유는? 너무 귀여우니까.
도쿄 휴대전화 매장에 전시된 키즈폰(왼쪽)과 도라에몽 키즈폰.
이 귀여운 폰은 되는 것보단 안 되는 게 더 많을 만큼, 제한된 기능 투성이었다. 애초에 웹 브라우저로 인터넷 접속은 불가능하며 어떤 애플리케이션도 깔 수 없다. 문자 메시지는 일본어와 영어로 써 보내는 것만 가능하고, 사진과 영상은 저해상도 수준으로만 촬영이 가능해서 멀리 있는 뭔가를 당겨 찍으면 마치 일부러 모자이크를 한 것 같은 느낌도 줬다. 전화 통화나 문자는 부모를 비롯해 지정된 사람들과만 가능하며 그 외의 모든 연락은 차단된다. 기기 머리 부분에는 짧은 줄이 앙증맞게 달려있는데, 혹시 위험한 순간이 닥쳤을 때 줄을 당기면 큰 알람소리와 함께 현장이 영상으로 촬영되고 부모 혹은 경찰 등에 연락할 수 있다.
최신 기술에 무지한 나 같은 부모는, 스마트폰으로 어린이에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요소를 대부분 막은 듯한, 이 섬세한 폐쇄에 감탄하고 썩 안심이 되긴 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이 기기를 과연 스마트폰으로 분류해도 될까, 가성비는 좀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왜 이런 폰이 출시되지 않았는지도 알 거 같았다. 나는 스마트폰이라기보다는, 아주 먼 거리까지 소통이 가능한 성능 좋고 팬시 하지만 좀 많이 비싼 무전기를 하나 구입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자주 이 휴대전화기를 집에 두고 다녔다.
그로부터 얼마지 않아 SNS 광고 피드에서 또 다른 도라에몽 기기를 발견했다. 작고 네모난 기기 사진에 번역기능을 강조한 문구를 보고선 처음엔 우리가 샀던 그 키즈폰에 번역기능을 추가한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기기는 폰이 아닌 그냥 번역기였다. 과거 가지고 다녔던 전자사전이 떠올랐다. 물론 이 귀여운 최신 번역기는 그런 사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능도 월등하고 사용성도 편리하며, 어린 학생들이 외국어 학습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여러모로 다양한 장치도 추가했다. 그래서 광고 하단에는 자녀에게 사주고 싶다고 쓴 댓글이 더러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파파고도 있고 구글 번역기도 있는 이 시대에 이 기기의 시장성에 나는 괜히 걱정이 됐다.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남미의 섬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하며 생태계를 형성한 고유종들이 육지에서 외부종이 들어오자 약한 면역력 탓에 멸종 위기를 맞은 것처럼, 산업에서 자국 표준을 고집함으로써 세계시장에서 고립되는 현상을 뜻하는 용어다. 이 말은 개발자 출신 기업가 나쓰노 다케시가 1980~90년대 전자산업에서 세계를 선도했던 일본이 내수에만 집중하고 국제 표준을 따르지 못하면서 2000년대 이후 IT산업에서 큰 부진을 겪게 된 것을 비판하며 처음 등장했는데, 일본에서는 일본(Japan)과 갈라파고스(Galapagos)의 합성어인 ‘잘라파고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실제로 도쿄에 머물면서 나는 기술적으로 깊이 파고들었으며 사용할 소비자에 대해 섬세하게 배려했으나, 어쩐지 세계시장의 트렌드와는 다소 어긋나는 제품들을 종종 접할 때가 있었다. 예컨대 편의점 등에서 동전과 현금 등을 계산하는 기계의 민첩함은 정말 감탄할 수준인데 사실 지금의 세상은 동전은 물론 지폐도 없애자는 현금 없는 사회로 가고 있다.
일본항공 인스타그램 계정에 소개된 로봇 제트.
한 때 SNS에서는 일본항공(JAL)의 로봇 제트가 공항에서 한국어로 말을 걸자 “한국어…? NO…”라고 말하며 당황해하는 영상이 화제였다. 사실 이 로봇은 인공지능 AI가 아니라 사람이 VR기기를 활용해 원격 제어하는 기기였다. 코로나 팬데믹처럼 비대면이 필요한 시기에 어느 정도 유용할 순 있겠지만, 사람이 없을 경우 아예 운영이 어렵고 외국인 응대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외에도 그 쓸모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로봇 중에는 도장 찍는 로봇이 있다. 2019년 처음 선보인 이 로봇은 종이를 넘기고 도장 찍는 위치까지 인식해 날인하는 기술력을 갖췄지만 한국에서는 주로 온라인 유머 게시판에서 소개됐다. 전자결재를 도입하지 않고 부득불 도장을 유지하려다 보니 생겨난 일본만의 특이종인 셈이다.
분명 일본 정부나 기업 입장에서 이런 분위기는 큰 문제처럼 느껴질 것이다. 일본정부는 이런 디지털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해 2021년에는 디지털청을 신설했고 최근에는 정부가 나서 AI 개발에도 적극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일본이 세계 표준을 따라잡겠다며 급변신 하진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사실 첨단 기술에 별 관심이 없는 나 같은 이방인인에겐 가끔씩 이런 잘라파고스 제품이 신제품이라고 버젓이 등장하고, 또 일부에서 그럭저럭 소비되는 상황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종종 가성비가 떨어지는 것 같아 실망스럽다가도, ‘뭐, 귀엽네’하며 금세 너그러워지곤 한 달까. 그래서 어쩌면 갈라파고스화는 귀여움 전략과 시너지 혹은 상호보완관계에 있을지도 모른다. 억지스럽다고? 너무 따지지 말고, 그저 귀엽게 봐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