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정오의 노래자랑
Tokyo Keyword / NHK 노래자랑 NHK のど自慢
가족들이 아직 도쿄에 머물고 있다 보니 주말을 이용해 자주 도쿄를 찾는다. 금요일 밤늦게 비행기를 타고 자정 무렵 도쿄에 도착한 뒤, 2박 3일이 아닌 2박 2일을 보내고 다시 일요일 밤늦게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
주말에 도쿄에 다녀온다고 하면 많은 이들이 “부럽다” “좋겠다”류의 인사를 건넨다. 이런 인사에 종종 “여행 아닌데요”라고 답하기도 했지만 나중엔 귀찮아서 “네”하곤 만다. 사실 주말 도쿄 방문이라면 쇼핑이나 맛집 같은 일반적인 관광코스를 떠올리는 게 당연할 테니까.
물론 내가 도쿄에 와서 하는 일도 쇼핑, 맛집 방문과 아주 무관하진 않다. 긴자나 신주쿠, 시부야 같은 번화가가 아닐 뿐, 동네 마트와 편의점을 들락거리며 식료품이나 세제, 생활용품 쇼핑을 하고 여유가 있을 땐 동네 이자카야나 야키니쿠집을 찾아가 외식을 하니까. 대략 서울에 사는 누군가가 전라도나 경상도 어딘가에 사는 가족을 만나 주말을 보내는 것과 비슷한 패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서울과 도쿄는 확실히 가까운 나라다.
이런 내게 도쿄의 일요일 정오는 꽤 애매한 시간이다. 보통 저녁 비행기를 타기 위해 오후 3~4시경 집을 나서는데, 일요일 정오쯤 되면 어딘가 거창한 외출을 다녀오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집에 마냥 드러누워있기에도 억울한 마음이 든다.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하며 TV를 켠다. 일요일 정오의 클래식한 선택, NHK ‘노도지만(のど自慢)’의 시간이다.
직역하면 '목 자랑'이라는 뜻인 노도지만은 KBS 전국노래자랑 같은 방송이다. 노도지만이 시작한 건 1946년이고 전국노래자랑의 전신인 ‘KBS배 쟁탈 노래자랑’이 시작한 게 1971년이니 엄밀히 보면 KBS전국노래자랑이 NHK노도지만을 따라 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전국노래자랑이 그렇듯 이 방송도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노래경연을 열고, 그곳의 지역민들이 무대에 오른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포맷이라 이해가 어렵지 않고 이러저러한 노래가 나오기에 적당히 흥이 난다. 사전에 지역 예선을 거쳐 선발된 청소년과 노인, 외국인 등등 각양각색의 출연자들이 등장한다. 주로 MC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사연을 전하는 한국의 전국노래자랑과 달리, 노도지만은 화면 왼쪽 하단 2~3줄 자막을 통해 출연자들의 사연을 간단히 내보낸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쓰시던 시계를 손에 들고 나와 노래를 부르는 여고생, 홀로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20대 아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부르기 위해 참가한 교사 등 각양각색의 출연자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는 사이 이들 각자의 사연이 소개되는 식이다. 일본어가 유창하지 않은 내 수준에서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만큼 사연의 내용은 간단한데, 그 짧은 사연만으로도 노래 부르는 참가자와 조금은 친해진 기분이 든다는 게 이 프로그램의 매력이다.
더불어 흥미로운 점은 비슷한 포맷의 방송에서 한국적인 것과 일본적인 것의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맨 처음 이 방송을 접했을 때 내가 놀란 것은 제작진이 이른바 ‘딩동댕’에 무척 인색하다는 것이었다. 실로폰을 사용하는 전국 노래자랑과 달리 노도지만은 튜블러벨이라는 원통형 악기로 합격과 불합격 여부를 판가름하는데, 노래가 끝날 때 ‘딩동’ 류의 소리가 계속 나길래 처음엔 그 ‘딩동’이 ‘딩동댕’의 의미인 줄 알았더랬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합격음은 우리의 딩동댕동보다 더 요란한 ‘딩동댕동 딩동댕동 딩동댕’ 수준의 긴 세리모니였다.
사실 한국 전국노래자랑에서 ‘땡’을 듣는 것은 희귀한 편이다. 가창력이 뛰어난 이들이 많은 것도 이유겠으나, 한국인 특유의 ‘정’도 한몫했다고 본다. 당장 노래실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사연이 특별하다던지 퍼포먼스가 뛰어날 경우 전국노래자랑에서는 웬만하면 딩동댕으로 통과시켜 준다. 상에도 후한 편이라 ‘특별상’과 ‘금주의 챔피언’ 단 2개의 상이 있는 노도지만과 달리, 인기상, 장려상, 우수상, 최우수상 등 종류도 많으며 이에 따라 가창력은 별로였으나 퍼포먼스가 괜찮았던 참가자는 인기상이라도 하나 거머쥐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런 퍼포먼스와 사연이 그다지 평가에 영향을 주지 않는 듯하다. 최근 봤던 노도지만에서는 84세 할머니가 직접 자신이 만든 원피스를 입고 나와 ‘원조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의 노래 ‘푸른 산호초’를 불렀지만 결과는 땡. 주 2회 가라오케와 온천을 다닌다는 목청 좋으신 86세 할아버지, 만삭으로 무대에 선 임신 8개월 예비엄마 모두, 땡이었다. 그들이 탈락할 때 정말 나는 일본인들이 매정하다고 느꼈다. 어쨌건 그래서인지 우승도 아니고, 합격의 딩동댕만 받아도 일부 출연자들은 눈물을 흘릴 만큼 감격스러워한다.
또 대부분 야외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출연자뿐 아니라 코러스나 무용단의 활약도 돋보이는 전국노래자랑과 달리,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노도지만은 다소 단출한 인상을 준다. 지역 특산물이나 자신이 만든 음식을 무대로 챙겨 와서 MC에게 먹여주는 행위 같은 것도 일절 없다. 이런 메마른 사람들 같으니라고. 사실 녹화방송인 전국노래자랑과 달리, 노도지만은 45분의 짧은 편성에 생방송으로 20개 팀을 출연시켜야 하다 보니 시간의 압박을 받는 제작진으로서는 최대한 방송 사고를 막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나는 한국인이어서인지 전국노래자랑이 흥과 신명에서는 청출어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점심식사 중 노도지만을 보며 각자의 감상을 쏟아내곤 했다.(“저 사람 꽤 잘 부르는데?” “에이 역시 냉정해!”) 그리고 방송과 점심 설거지가 끝날 즈음이면,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짐을 챙겼다. 두 나라 사람들이 아주 오랜 시간 일요일 정오, TV 앞에서 비슷한 포맷의 방송을 보며 이웃들의 사연과 노래에 공감해 왔다는 걸 떠올리면 근거리, 같은 시간대를 쓰는 것 외에도 한일이 함께 공유할 만한 이야기가 꽤 많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드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 두 프로그램의 명맥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어떤 촌스러움은 꽤 강력한 매력이 있다. 일요일 정오, 우리가 노래자랑을 보는 이유다.
(커버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Holger.Ellga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