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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치불고 Oct 29. 2024

존경받는 노인

Tokyo Keyword / 이치닌마에 一人前

   최근 도쿄 버스에서 목격한 장면. 사람이 붐비는 버스에 할머니 한분이 커다란 짐 가방을 들고 올라탔다. 일본 버스나 전철에서는 한국에 비해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쉽지 않데, 이날은 이례적으로 근처에 앉아있던 중년 남성이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했다.    

  하지만 손까지 올리며 단호하게 거부할머니.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 단호하셔서 나는 그가 곧 다른 정류장에서 하차 거라고 생각했다. 웬걸, 다음 정류장에서 사람이 버스에서 내렸는데 할머니는 그 틈 캐리어를 신속하게 고 가 비어있는 자리 하나를 맡으셨다. 즉, 할머니 역시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남에게 신세 지는 게 싫어서 거부했던 것이었다. 아니 뭐, 저렇게까지, 그러실까.   

   

  ‘이치닌마에(一人前)’라는 일본어가 떠올랐다. 직역하면 1인분, 한 사람의 몫이라는 뜻이다. 보통 의 도움 없이 능력이나 기술에서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수준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사코 자신에게 주어지는 배려를 거부한 캐리어 할머니를 보면서 이 말이 노인이 된 이들에겐 좀 가혹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회적 비용으로만 따져보자면 생산 가능 인구에서 제외된 노인은 사회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회에 부담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때 장수가 축복이던 시절이 있었다. 예컨대 한국에 노인의 날이 있듯 일본에도 경로의 날이 있다. 사실 인지도 면에선 일본 경로의 날이 명한 것 같다. 일본 경로의 날의 전신인 노인의 날은 무려 1970년대에 생겼고(한국은 1997년 제정), 심지어 공휴일이다. 원래 9월 15일이었던 경로의 날은 일본 정부가 공휴일과 주말 휴일이 겹치는 걸 막기 위해 공휴일을 월요일로 고정하는 해피먼데이 제도를 운영하게 되면서 현재는 9월 셋째 주 월요일이 됐다. 5월 어머니의 날, 6월 아버지의 날 등이 지나면 경로의 날이 온다.      


  애초 경로의 날은 노인을 경애하고 장수를 바라고자 만들어졌다지만 노인이 너무 많아진 요즘에는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경로의 날이면 일본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일제히 노인 관련 통계를 발표한다. 지난해(2023년) 경로의 날에는 80세 이상 노인이 일본 인구 열 명 중 한 명(10.1%) 수준이 된 데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의 29.1%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화제였고, 올해는 노인일터에서의 산업재해 비율이 높다는 내용 등이 소개됐다.

  이와 함께 어김없이 등장하는 소재가 일하는 장수 노인에 대한 것들이다. 100세 넘어서도 현업에 계시는 약사 할머니나 90대에도 맥도널드 크루로 일하는 할머니, 80대 클럽 DJ 할머니 등을 뉴스에서 봤다. 존경심이 드는 한편, 마음이 무거워졌다. 경로의 날의 원래 목적은 장수하는 노인에 대한 존경이었는데, 더 이상 오래 사는 것만으론 충분한 존경을 받을 수 없다. 이제 존경받기 위해서는 노인도 ‘이치닌마에’를 해야 할 것 같다.      


  좀 뒤에 노인이 될 내 세대는 나중에 이런 강박을 더 많이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생산가능인구가 지금보다 더 줄고 노인의 비중이 훨씬 높아질 테니 말이다. 그래서 어찌 됐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나이를 먹어서도 일을 해야지 싶다. 이미 세상에선 아예 노인 기준 연령을 현재의 65세 말고 75세로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게다가 많은 장수 전문가들은 일을 하는 것이 오래 사는 비결이라고도 한다. 장수를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하면 장수를 하며, 장수를 하고 일을 해야 존경을 받는다. 그런데 쓰고 보니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프로파간다 같기도 하다. 일을 하지 않으면 존경받지 못하고, 오래 살지도 못한다는 것인가. 우리 시대의 시시포스는 곧 떨어질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리면서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감정노동까지 더해졌다.      

 

 한국사회가 초고령화 시대의 초입에 있는 요즘, 중년인 나는 30년쯤  내가 올라 탈 버스를 상상한다. 그때 과연 버스 자리 따위에 초연할 수 있을지. 버스에 오르면 지금도 잽싸게 자리를 맡는 나는, 좀 걱정이 된다. 모두가 노인이 된 나를 외면할 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혹은 누군가 호의를 베풀 때에도 담대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다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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