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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 Jan 03. 2023

내 생에 가장 힘들었던 순간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면 꼭 배웠으면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수영'

바다에 가고, 계곡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나는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허리 정도 깊이의 물에 몸을 담그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 아이들만큼은 수영을 잘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큰 아이가 1학년이 되고 여름 방학이 다가오자 계획대로 수영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수강 등록을 마쳤다. 내가 다 설렜다.

방학이 되면 발차기부터 시작하는 거야.


주말에 친정에 갔다. 친정은 식구가 많아서 때로는 각자 가족끼리, 때로는 남자끼리, 이렇게도 자고 저렇게도 잔다. 그날 큰 아이는 아빠와 함께 잤다.

아침 7시나 되었을까...? 울먹이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남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넌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너무나 선명했다. 가슴이 철커덩 내려앉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뻗뻗하게 굳어가는 아이를 안고 남편이 거실로 나왔다. 아이의 몸은 마비되고 있었다. 눈에 초점은 없었고, 입에서는 거품이 나왔다. 남편은 아이가 숨을 쉬지 못할까 봐 아이의 입 속에 자신의 손가락을 집어넣고 울부짖었다. 아이가 너무 세게 물어 손에서 피가 났지만 그런 아픔 따위 느낄 새가 없었다.


119. 그래 119가 있었지

난생처음 119에 전화를 했다.

"저기요, 여기 00인데 아이가 몸이 굳어가요.. 빨리 와주세요"

숨이 넘어갈 듯 겨우 말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상담원은 너무나도 차분했다. 주소를 말하고 빨리 와 달라고 하는데도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상담원에게 욕을 해주고 싶었다.

금세 올 거라 생각했던 구급차는 오지를 않고 일분일초가 다급했던 우리는 직접 운전해서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비 오는 것 따윈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하는 도중에 구급차를 만났다. 중간에서 아이를 구급차로 옮기고 그렇게 병원 응급실로 갔다. 무서웠다. 아이를 잃을까 두려웠다.


친정은 지방의 작은 도시다. 종합병원이라고 있지만 전혀 신뢰할 수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검사를 진행했지만 원인을 모르겠다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남편과 나는 전원을 의뢰했다.

잠들어 있는 아이를 들 것에 옮겨 사설구급차에 태웠다. 난생처음 타 보는 구급차가 무섭고 차갑게만 느껴졌다.

사이렌을 켜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며 계속 눈물이 났다. 어제까지 건강했던 아이가 왜 이런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별 일 아니기를. 아무 일 없기를.


대학 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후 원인을 찾기 위해 입원을 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검사들이 진행되었다.

아이의 진단명은 '소아뇌전증'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뇌전증? 그건 간질 아닌가? 왜! 우리 아이에게 왜!!


아주 오래전 도서관에서 갑자기 쓰러져 온몸을 부르르 떨던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 누군가는 단순히 궁금해서 쳐다보고 있었을 테지만 당사자는 경련이 끝난 후 얼마나 민망하고 수치스러움을 느꼈을까. 그때의 그 시선. 그 분위기. 이런 것들을 내 아이가 겪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마음을 진정시킨 후 가장 먼저 한 질문은

"담임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야 할까요?"였다.

집 다음으로 가장 오랫동안 머무르는 장소이기도 하고, 아이가 쓰러졌을 때 도와줄 누군가는 있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를 바라볼 주변의 시선이 걱정되어 발병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고 했다. 아... 그럴 수 있겠구나.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나 또한 한 동안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수영등록을 취소했다. 뇌전증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수영은 가장 피해야 할 스포츠였다. 물속에서 증상이 나타나면 답이 없으니.. 시작 전에 알게 된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후로 내 시선은 언제나 아이를 향했고 늘 불안했다.


소아뇌전증은 원인파악이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완치의 개념도 없다. 다만 증상을 예방하는 약이 있을 뿐이다. 그 약이 아이에게 잘 맞아서 부작용 없이 증상이 나타나지만 않아도 참 감사한 일이었다. 아이는 처음 처방받은 약 복용 후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부작용을 겪고 한 차례 약을 바꾸었다. 그리고 꾸준히 복용했다.


발병 후 꼬박 3년.

매일 아침저녁 12시간 간격으로 약을 복용했다. 하루 두 번 알람은 필수다. 자다가도 먹어야 했고, 놀다가도 알람이 울리면 먹어야 했다.  

다행히 약을 먹고 나서부터 전신경련은 없었다. 두어 번의 가벼운 부분 발작이 있었을 뿐.

첫 발병 후 6개월 주기로 뇌파 검사를 했다. 불빛 하나 없는 컴컴한 검사실에 앉아 검사가 끝날 때까지 눈을 감고 기도했다. 2년쯤 지났을 무렵부터 위치를 바꿔가며 나타나던 경련파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완치가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던 것 같다. 3년이 지난 후 선생님은 아이에게 이제 수영을 해도 되겠다는 말로 아이의 완치를 알려주셨다.(병원에선 완치라는 표현을 쓰지 않지만 나는 완치라 말하고 싶다. 이 병과의 끝맺음을 간절히 바라기에.) 정말 감사했다.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아이가 눈물 나게 고맙다. 약을 끊은 지 2년이 되어 가는 듯하다. 처음엔 6개월에 한 번씩 하던 뇌파 검사를 이제는 1년에 한 번씩만 한다. 그날이 오늘. 아이는 검사를 잘 받았다. 여전히 먹먹하다. 이번에도 무사히 지나가기를.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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