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참 듣지 않는다. 우리는 참 배우지 않는다.
나는 주식을 공부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공부라는 것이 어느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는 어떤 것은 아니다.
내가 전문'투자자'라는 말보다는 '트레이더'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트레이딩이라는 것을 제대로 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들의 얼마큼이나 알고 있는가?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 나에게는 반복되는 심경변화 패턴이 있다. 어떤 날은 공부할 양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가, 또 어떤 날은 이제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 중 어떤 경우가 나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경험상 어느 쪽도 나에게는 좋지 않았다. 이런 생각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만약, 여러분이 생전 처음 듣는 병에 대한 얘기를 어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듣는다고 치자. 그 의사가 하는 말이 너무 어렵고 낯설더라도 아마도 당신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나의 병에 대한 얘기이고, 나는 이 내 몸을 잘 다루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이런 생각들이 이 머릿속에 맴돈다면 과연 어떠할까?
'왜 이렇게 말이 어려워'
'그래서 뭐라는 거야?'
'이 사람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 맞아?'
'실력은 있는 거야? 다른 병원에 가볼까?'
물론, 고려해 볼 수 있는 생각들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아마도 우리는 상대의 말을 듣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그 의사 선생님께서 나에게 너무 익숙하고, 내가 잘 알고 있는 말로 내가 걸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면 어떤가?
이번에는 나는 과연 그의 말을 잘 듣고 있을까? 아마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잘 듣고 있지 않을 확
률이 크다. 자신의 증상에 대한 판단은 물론, 의사의 진료 태도까지 평가하느라 머릿속은 수많은 속삭임으로 가득하다.
누군가의 글을 읽거나 말을 들을 때에도
또 어떤 것을 배우고자 할 때에도
어떤 이와 대화를 할 때에도
나는 상대를 보고 듣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의 말을 듣는 것이다.
그러면서 외부에서 전해지는 말을 왜곡하고 해석하며 평가하고 판단한다. 그러느라 듣지 않는다. 듣지도 않으니 배울 수는 더더욱 없다.
나는 시장으로부터 배우는 트레이더이다.
나는 시장이 하는 말을 잘 듣겠다.
다 듣고, 나의 판단이 요구될 때 힘 있게 선택한다.
그리고 언제든 그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나의 판단의 결과가 좋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내 판단이 옳다고 볼 수 없을 안다.
나는 내 경험이 하는 말도 잘 듣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