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는 1830년 도시화되기 시작한 미국 중부지역 가장 큰 대도시이다. 다운타운에 들어서면 역시 대도시라고 할 만큼 고층빌딩이 산너머 산처럼 빼곡히 들어서 있다. 멀리서 보면 고층빌딩만 즐비하게 서있을 것 같은데, 다운타운을 직접 걷다 보면 도시계획에 있어서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교과서가 될만한 도시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 때문인 지는 몰라도, 서울에 비해 마주치는 사람의 수가 적고 거리도 대체로 한산한 편이다. 있을 건 다 있는 대도시지만, 여유롭고 편안하다.
하지만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시카고의 다양성이다. 한 블록 한 블록 지날 때마다 도시 안의 작은 도시에 온 것 같이 분위기가 매번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모든 동네가 다양하고 매력적이다. 그리스 정교회에서 미사를 보고 나오는 80년대 유럽식으로 꾸민 그리스인 노부부를 만날 수 있고, 조금만 더 걸으면 바로 미국 중서부 최대 LGBT 커뮤니티인 보이스타운 (최근 더 다양하고 포용적인 이웃을 만들자는 취지로 동네 이름을 노스할스테드/Northalsted로 변경했다) 입구를 지난다. 조금 더 걸으면 1914년에 처음 오픈한 위글리 필드 야구장이 나온다.
[왼쪽부터] 셰필드 그리스 정교회, 노스할스테드 주변 웰링턴 전철역 옆 한 건물, 위글리필드
이렇게 다양한 문화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시카고 역사가 궁금해서 여기저기 뒤져보니, 초기 역사가 굉장히 인상적이다. 도시가 정말 빨리 팽창했다. 1837년 마을에서 도시로 승격된 후, 30년도 안된 1860년에 미국 최대의 무역도시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날치기로 세워진 도시가 과거, 현재, 미래가 잘 어우러진 현재의 시카고가 된 배경이 궁금했다. 시카고는 과거에는 어떻게 정의되었고, 현재는 어떻게 정의되는 것일까?
우선 올드타운, 링컨파크, 그리고 미시간 호수 등 관광명소와 모두 맞닿아있는 시카고 역사박물관으로 향해 시카고 역사에 대해 알아본다.
시카고 역사박물관 (1601 N Clark St, Chicago, IL 60614)
시카고 지역에는 1만여 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미국식 지리로 따지자면, 마이애미, 일리노이, 오타와, 포타와토미 등 지역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시카고 쪽으로 이주한 것이라고 한다. 이 원주민들은 시카고 지역을 미시간 호수 주변에서 자라는 야생 양파가 자라는 들판을 뜻하는 쉬카쿠아(shikaakwa)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이어져 현재 도시 이름인 시카고가 되었다.
유럽에서는 1600년대부터 미국산 비버 모피가 인기가 높았었는데 (옷이나 모자 장식에 쓰였다고 한다) 일리노이 근방에 살던 이주민들은 원주민들과 협력하여 모피를 구입하고 필요한 것으로 물물 교환했다. 모피가 그 당시 너무 중요한 무역상품이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경제권을 서로 차지하려는 각 지역의 원주민들이 미국 땅을 차지하려는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와 연합하여 자주 전쟁을 벌였다.
시카고 이주자와 원주민이 함께 일하고 있는 장면. 바닥에 비버 털이 깔려있다 T.T (시카고 역사박물관 전시물)
이런 와중에 1673년 캐나다로 이주한 프랑스인 루이 졸리 (Louis Joliet)와 프랑스 신부 자크 마르켓 (Jacques Marquette)이 카누를 타고 캐나다에서 미시시피강을 따라 남쪽 지역을 답사하면서 시카고 강을 발견한다. 당시 시카고 일대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은 미시시피강과 오대호 (the Great Lakes) 사이에 얕은 늪지대인 육로 루트를 알고 있었다. 이 루트는 여름철이면 카누를 타고도 서쪽의 미시시피강과 동쪽 오대호 사이를 건널 수가 있기 때문에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였다. 원주민들이 이 루트를 졸리와 마르켓 신부에게 알려주게 되고, 이들은 곧 이곳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인 이주민들이 이 지역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1708년 카스카스키아 (Kaskaskia)라는 곳이 일리노이 지역 최초 프랑스 지배지가 되었다.
시카고에 최초로 정착한 이주민은 장 밥티스트 포엥 두 사브르 (Jean Baptist Point Du Sable)라는 아프리카계 프랑스인으로 1780년 시카고에 도착했다. 시카고 북쪽 제방 쪽 미시간 호수 근처에 집을 지었다. 두 사브르는 처음에 비버 모피 무역을 했는데, 원주민에게서 모피를 구입하는데 네트워킹을 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포타와토미 원주민을 아내로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원주민과 함께 북미 지역의 새로운 곳을 더 탐사하고 인구를 늘리길 원했기 때문에 원주민들과 공생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다. 미국 땅이 개척지였던 만큼 여성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원주민과 결혼을 한 이유도 있었다. 즉, 시카고 지역에 최초로 프랑스인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다양성의 시초로 보인다. 지금 시카고를 보면 이런 다양성의 역사적 상징성을 지혜롭게 잘 활용하고 긍정적으로 포장해서 도시를 이미지화한다.
1700년대 들어서는 미국 전역에서는 독립 미국 연합과 영국,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간의 독립전쟁이 이어졌고, 1800년대에는 미국 연합과 원주민들의 전쟁 그리고 남북전쟁도 이어진다. 그러나, 시카고는 중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런 전쟁을 벌이는 장소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50년이 채 되지 않아 1833년 시카고 마을이 공식적으로 설립되고 1837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1830년대 시카고 풍경. 맨 앞 건물은 1831년 건축된 시카고 최초의 호텔이다. (시카고 역사박물관 전시물)
1860년대 시카고 다운타운 (시카고 역사박물관 전시물)
원주민이 가르쳐줬던 육로 루트를 바탕으로 이주민들은 계속해서 다른 지역과 무역을 하였고, 이 루트가 건조하거나 얼어서 단단해질 때에는 짐마차를 끌고 이동할 수 있었다. 웨건 로드 (Wagon Road)라고 불렸던 향후 미국 최초의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는 66번 국도 (Historic Route 66)가 되었다. 1840년 대에는 운하를 건설했고, 또 운하에서 육로로 상품을 이동할 수 있게 철로도 깔렸다. 이렇게 무역과 교통인프라의 허브가 된 시카고에 미국 전국에서 투자자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또, 시카고와 일리노이 지역은 지금도 농작지가 끝없이 펼쳐지는 곳이 많은데, 이주민들은 농작물을 수확하고 곡식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쉽게 이송하고 밀 등급 표준을 정립하여 밀무역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렇게 이 지역 무역상인과 밀을 수확하는 농작민들의 무역 커뮤니티가 빠르게 성장했다.
시카고 미술관 (Are Institute of Chicago) 바로 앞에 표시되어 있는 미국 66번 국도의 시작점.
원주민들이 이미 닦아놨던 다른 길들도 현재까지 시카고의 주요 도로를 형성하고 있는데, 시카고의 도시계획은 격자형 건설이었지만, 원주민 도로는 대각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도로들만 예외로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밀워키 애비뉴 (Milwaukee Avenue), 그랜드 애비뉴 (Grand Avenue), 오그덴 애비뉴 (Ogden Avenue) 등이다. 모두 시카고 최초의 길이다.
그랜드 애비뉴와 오그덴 애비뉴 접점 지역
밀워키 애비뉴 어디선가
이렇게 원주민과 동업하여 비버를 사냥하며 작은 마을로 시작했던 시카고는 도시로 승격된 지 30여 년만인 1865년에는 인구 10만의 도시로 팽창했다. 1870년대에는 철도가 시카고를 중심으로 미국 전역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이로써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가장 성공한 산업도시로 거듭났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그 사람들이 거주하기 위한 집들이 무질서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집들은 거의 대부분 나무로 지워졌는데, 이 나무로 만든 건축물들 때문에 성공가도를 달리던 시카고는 1871년 대위기를 맞게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