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 이야기
대학교 4학년을 휴학 없이 마쳤다. 학교 생활과 동아리 활동은 성실히 했지만, 졸업 이후의 진로는 결정하지 않았다. 졸업 전시를 하고 배낭여행도 다녀왔는데, 과 특성상 미리 취업준비를 하지 않았으면, 안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모했고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당시 패션디자이너가 하고 싶어 국비 직업 훈련을 다녀서 색채학과 의류 쪽으로 배웠는데, 맞지 않았고 다시 직업 탐색 검사를 해보니 예술과 교사 분야가 높게 나왔고, 교사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게 무색하게도 엄마의 바람대로 교육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합의했다.
6개월간 시험 준비를 하고, 이듬해 대학원에 입학했다. 동시에 아르떼에서 사회분야 미술강사로 활동하며 1년간 경험을 쌓았다. 부산의 한 복지시설에서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처음엔 아이들이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와서 수업하고 어차피 금방 떠날 강사라는 이유에 선지 초반에는 눈물겨운 한 달이 이어졌다. 왕복 3시간 거리였지만, 매주 금요일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복지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미술이라는 과목 덕분일까, 한 달 뒤에는 아이들과 즐겁게 수업하며 정이 들었다. 떠나던 12월, 아이들은 손수 만든 본인들의 어린 사진이 담긴 사진 수첩과 편지를 건네주었다.
교육대학원의 2년 반 과정은 쉽지 않았다. 교직과목 이수와 5학기에는 중학교로 교생 실습을 나갔다. 아이들과 함께 스승의 날 행사와 걷기 대회에 참여하며 진짜 교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학생들이 영상으로 찍어준 이벤트는 아직도 사진첩에 저장되어 있다. 선배 교사들의 친절함에 마지막 날에는 울어서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런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흘릴 수 없는 지점에 와있다. 모든 게 추억이 되어버렸다.
졸업 시즌이 되자 임용시험을 칠 것인지 기간제 교사로 시작할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교직에 대한 큰 미련도 없었고, 임용시험을 준비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친구가 임용을 준비할 때, 나는 교육청에서 올라온 단기 강사 자리부터 지원하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이듬해 사립 고등학교 미술 교사 자리를 얻게 되었고, 그렇게 첫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이 학교에서는 4년을 일했다. 담임을 맡지는 않았지만 야간자율학습도 담임선생님 못지않게 했고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다. 젊은 열정으로 학생들에게 미술의 모든 좋은 점을 전하고 싶었고, 때로는 야외에서 수업을 하고 우드락과 물감 색종이 등을 활용해 건축물을 세워보는 수업을 하였다. 남녀공학이라 편차가 심해 어떻게 하면 남학생도 재밌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시도를 했다. 재료비가 부족해 내 사비를 털어 재료를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열정은 3년 차가 되자 재가 되어 돌아왔다. 너무 지쳤고 공허했다. 학교와 학생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정작 나를 위해 무엇을 했나 하는 회의감이 몰려왔다. 처음엔 그만두려 했지만, 주변 만류에 1년만 더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나를 위해 그림을 동시에 그리기로 했다. 목표는 12월 아트페어 참여였다. 그렇게 4년 차는 그림과 일을 병행하며 지냈다. 주변 동료들의 도움으로 가능했고, 아트페어도 무사히 성공적으로 마쳤다.
마침내 교직을 떠나기로 결심한 해, 교수님의 권유로 VR 아트를 접하게 되었다. 2019년, 코로나가 터진 그 해였다. 하기로 하고 불안할 것 같아 반개월 정도 교사자리도 알아보곤 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터졌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면서 결국 실업급여를 받으며 혼자 VR 아트에 몰두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꿈만 부풀었다가 실망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은 해였다. VR 기계가 나에게 버거워 정형외과에 입원하며 치료하기도 했고, 내 마음은 처음으로 롤러코스터를 탔다. 하지만 이 시기를 견디며 얻은 마음의 근력 덕분에 지금은 더 이상 교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불안하지 않았다.
이후 2020년부터 2022년까지 미술 교사와 강사 생활을 병행하며 그림을 그렸고, 복합문화센터에서 그림도 전시하고 그림에 대해 청중 앞에 소개도 해보았다. 차근차근 나의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안정감이 필요하여 2023년, 다시 미술 교사로 돌아왔다. 학교의 요청으로 학생들에게 VR 아트를 가르쳤고, Ai코리아를 2년 연속 담당선생님과 학생들과 참여하기도 했다. 2년 동안 또 나름 불태우며 슬기롭게 학생들과 유대관계를 잘 쌓으며 생활했지만, 내 특성상 자유로운 영혼에게 학교라는 틀은 여전히 힘들었다. 수업 준비는 즐거웠지만, 책임감이 강한 성격 탓에 완벽을 추구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빠르게 지쳤다.
그만둔 해 올해 2025년, 생애 처음으로 예비창업 계획서를 써서 서류까지 합격했다. 최종에서 떨어졌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많은 도움을 받아 썼던 계획서였기에, 쉽게 성공했다면 자만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일이 없지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AI로 영상을 제작하며 내 나름의 레퍼런스를 쌓아가고 있다. 비로소 삶이 행복해졌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음을 느낀다. 자연스러운 수익 구조도 고민하고 있다.
과거에도 미련을 둘 필요도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은 고민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현재를 충실히 잘 살다 보면 기회는 자연스럽게 올 것이다. 요즘 우리 집의 화두다,
옛말에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돌이켜보면 힘든 삶을 살았 다기보다는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해본 경험이 축적되어 내 삶의 양분이 된 것 같다. 앞으로의 삶을 무작정 걱정하기보다 나를 더 발전시키고 함께 더불어 재미있게 살아갈 방법을 찾고 싶다.